🌊Sea of Love; 사랑해(海)💙

  누군가의 얼굴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생김새만을 똑같이 그리는 것으로는 완성하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의 분위기, 표정, 말투,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 이 모든 것이 그림에 담겼을 때 온전한 그 사람이 나온다. 그림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담는다. 사진처럼 순간을 그저 찍는 게 아닌 붓 터치, 색감, 그리는 이의 감정, 이 모든 것이 반영된다. 그 모든 게 복합적으로 합쳐진 순간 내 눈앞에 존재하는 누군가와 가장 흡사한 인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과정을 담는다.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아닌 체험하는 것, 그 순간 달라지는 모든 것들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화가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려주기 위해 그녀의 저택에 고용된다. 하지만 엘로이즈를 그리는 건 결혼을 거부하는 그녀에게 비밀이었고 결국 마리안느는 관찰한 엘로이즈를 바탕으로 보지 않고 그녀를 그려낸다. 하지만 그냥 그리는 것이 어떻게 진실된 엘로이즈를 담을 수 있을까. 그건 그저 얇은 인물화에 불과했다. 마리안느 역시 그 사실에 감정이 상하고 저택에서 해고되는 듯했으나 엘로이즈는 어째서인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허락한다. 그렇게 둘은 본격적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에 들어가고, 둘 사이의 감정은 전과 달리 아주 깊어진다. 계속해서 서로의 눈을 마주치고, 서로를 바라보고, 관찰하고, 대화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이상의 아주 깊은 감정을 주고받는다. 그래서일까 마리안느의 초상화는 전과 달리 엘로이즈와 흡사한 인물을 그려낸다. 표정, 색감, 분위기 모든 게 점점 진실된 엘로이즈와 가까워진다. 하지만 더 완성도 높은 그림이 나올수록 둘의 이별의 시간도 점점 다가오게 된다. 과연 둘은 어떤 사랑을 시작해서 어떤 이별을 맞을까.

  이 영화에서 그림은 오직 마리안느만 그린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결국 이 모든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이 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엘로이즈는 보수적인 귀족집안에서 자라 항상 수동적인 선택만을 해온다. 하지만 마리안느와의 관계, 그리고 그녀와 함께 완성해 나간 그림은 모든 것이 능동적인 선택이었다. 둘 사이의 잔잔하지만 격렬한 사랑과 둘이 함께 완성해나간,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모두를 닮아있는 초상화는 타오르는 그녀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서로를 바라보며 만들어 나간 그 그림은 과연 무엇까지 담을 수 있을까. 그저 생김새만을 담은 작품이 아닌 끈질긴 끌림을 담은 그 그림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그 모든 걸 생각하면서 영화를 즐기길 바란다.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죠.”

  우린 가끔 더 사랑하고 싶어서 거짓말을 한다. 숨기고 싶은 부분을 억지로 숨기며 내 눈앞에 있는 사람과 더 사랑하기 위해 애를 써본다. 하지만 진실된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에 거짓말은 과연 어디까지 통할 수 있을까. 그리고 거짓 뒤에 숨겨진 진실을 마주할 때에도 과연 그 진실된 마음이 유지될 수 있을까?

기예르모 델 토로 | 2018 | 123'

  19세기 말, 모종의 사건 이후 말을 잃게 된 젊은 여성 ‘에이다’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어린 딸과 함께 낯선 뉴질랜드 땅에 도착한다. 그는 이제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이곳에서 정해진 결혼 상대인 ‘스튜어트’와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이 새출발은 시작부터 어긋나고 만다. 거센 파도가 무정하게 몰아치고 미지의 자연이 끝없이 펼쳐진 미개척지에서 에이다가 필요로 했던 것은 단 한 가지, 자신의 피아노였으나 뒤늦게 그를 데리러 온 남편 ‘스튜어트’는 에이다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옮기기 어렵다는 이유로 피아노를 해변에 버려두고 떠난다.

  에이다는 피아노를 치기 위해 남편의 동업자인 ‘베인스’라는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는 뉴질랜드의 자연과 원주민들의 삶에 완전히 동화된 남자로, 깊은 숲속 오두막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다. 스튜어트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에이다의 청을 단호히 거부하던 베인스는 고민 끝에 에이다와 딸을 해변으로 안내한다. 그곳에서 그는 아름다운 바다를 배경으로 즐겁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에이다의 모습에 매료되고 만다.

  에이다의 마음을 얻고자 베인스는 스튜어트에게 원주민의 땅과 피아노를 맞바꿀 것을 제안하고, 해변에 버려진 피아노를 옮겨와 조율까지 마친다. 땅이 욕심난 남편의 권유로 베인스의 피아노 레슨을 맡게 된 에이다는 마음껏 피아노를 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 피아노를 돌려주겠다는 베인스의 제안에 매일 그의 집을 찾는다. 그러나 이 거래는 점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베인스는 피아노 건반을 걸고 그녀의 몸에 손을 대는 조건을 하나둘씩 추가하고, 처음에는 경멸과 혐오에 불과했던 에이다의 감정은 점차 베인스를 향한 사랑으로 변화한다.

  일방적으로 피아노를 통해 세상에 자신의 감정을 분출했던 에이다는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견지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살아 숨 쉬는, 때문에 침묵하지 않는 존재임을 알려주었던 피아노에 대한 애정은 이제 베인스를 향한 사랑으로 옮겨간다. 에이다는 부서지는 파도에도 밀려나지 않고 모래 위에 네 다리를 굳게 디디고 선 해변의 피아노처럼, 재능의 날개와도 같았던 손가락이 잘리는 폭력과 제지를 무릅쓰고서라도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피아노>를 에이다와 베인스 간의 로맨스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베인스가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는 장면에서 에이다가 마주하는 것은 거울 속 스스로의 얼굴이고, 베인스와의 관계가 드러나 집에 갇혔을 때 역시 에이다가 입을 맞추는 것은 자신의 얼굴이 비친 거울이다. 에이다가 사랑하는 것은 스스로의 욕망을 마주하고 이를 쟁취하고자 행동하는 주체로서 눈을 뜬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결말부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피아노를 영원히 바다에 묻어버릴 결심을 하고, 피아노와 함께 깊은 바다에 몸을 던진 에이다는 돌연 그것을 뒤로한 채 다시 수면을 향해 떠오르기를 선택한다. 이는 일종의 부활(reborn)처럼 보인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소유, 누군가의 딸이나 아내가 아니라 스스로 삶을 선택한 하나의 주체로서 삶을 살아간다. 그 누구에게도 자기 몫의 선택을 대신하게 하는 법 없이, 잘린 손가락이어도 누구보다 즐거이 피아노를 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