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자X윤여정, 뮤즈의 관록🥀

김기영 | 1990 | 98'

  스크린을 채운 올림픽대교는 1980년대의 끝이자 1990년대의 시작이다. 허나 가정은 사회상을 따라가기 역부족인지 여정, 명자, 길자가 몸담은 구시대적 공동체는 일관성 있게 남성을 위주로 흘러간다. 대와 족보에 집착하는 측면, 임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당하는 이혼의 종용과 폭행.

  그러나 그녀들의 첫 만남이 운전 면허 시험장이라는 사실은 우연하지 않다. 차를 탄 여자들은, 아주 직설적이고 물리적이고 노골적인 사건 사이 매연처럼 상념을 일으킨다. 여정은 남편으로 인해 자식을 잃는다. 명자는 남편으로 인해 가정을 잃는다. 두 여성은 복수, 즉 살인의 대행을 약속한다. 선과 악의 합리적 구분을 무색하게 만드는 김기영의 세계 속에서 누군가는 헤매고 누군가는 직진하지만 그 종착지는 아이를 안은 원석의 앞좌석에서 운전대를 잡은 명자의 모습이다.

  한편 영화의 부제 〈천사여 악녀가 되라〉는 새로운 발상을 안긴다. 지킬 박사가 본인의 악을 에드워드 하이드라는 인격체로 독립시켰다면, 김기영은 ‘천사’ 명자로부터 악을 끌어내어 그녀를 새로이 고양할 ‘악녀’ 여정의 탄생을 그려낸 것이 아닐까.

  여성의 무서운 숙명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변화일 것이다. 이를 드러내고자 쓰인 정신없는 대사가 넘치지 않고 난데없는 조악함이 거슬리지 않는다. 여성들의 연대를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내는 주체가 김기영이라면 언제가 되었거나 찬성하고 싶다.

 천의 얼굴 김혜자. <만추>(1982)에서의 고아하고 정숙하던 여인은 온데간데 없이, <마요네즈> 속 그녀는 촌스럽고 억척스러운 경상도 중년 여성이 되었다. 7-80년대의 산만하고 투박하던 한국의 산업화는 어느새 안정되어, 모두가 아파트에서 평화로이 지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문화적 인식은 시대를 따라오지 못했다. 이 영화는 ‘엄마’와 ‘딸’, 그리고 ‘사회인’으로서의 역할을 모두 해내야만 하는 한 여성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북에서 내려와 자격증 없이 약국을 운영하던 아버지, 그 옆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알 수 없는 약을 털어 먹는 어머니, 그들의 첫째 딸로 살아가고 있는 아정(최진실)은 누구보다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커리어우먼이다. 평생 딸에게 자신의 욕심과 신세한탄을 덧씌우는 어머니와 눈만 돌리면 사고를 치는 어린 아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꿋꿋이 자신의 목표를 위해 대학원을 나오고, 글을 쓰는 일을 한다. 그러나 하나만으로도 벅찬 세상에, 해외로 떠난 남편의 몫까지 모든 짐을 홀로 지려 하니 아정은 점점 지쳐간다.

  아정의 답답함과 절망감은 스크린 너머까지도 너무 잘 전달된다. 이는 딸에게 자신의 입장만을 강요하는 어머니를 누구보다 잘 소화해낸 김혜자의 몫도 클 것이다. <만추> 이후 17년 만에 출연한 영화지만, 김혜자는 엄청난 흡인력으로 커피 마시는 몸짓에서 걷는 스타일까지, 가상의 중년 여성을 생생하게 살려내었다. 그는 <마요네즈>의 어머니가 ‘감성이 무척 발달하고 사랑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엄마에게 마요네즈는 머리에 바르는 미용품이었지만, 딸에겐 먹는 것이었지요. 애증에 시달리는 모녀는 각각 이상과 현실이라는 다른 범주에서 살아갔을 뿐이예요.”

 그녀의 해석처럼, 영화 속 두 모녀는 아무리 서로를 사랑해도 계속해서 평행선을 걷는 듯 보인다. 각자가 걸어온 다른 시대의 궤적 속에서 서로가 바라보는 현실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녀 갈등의 가장 큰 가해자는 어머니도, 딸도 아닌 가부장제에 있다고 본다. 음주와 폭력을 일삼은 데 모자라, 느지막에는 병까지 걸려 가족들에게 짐이 된 아버지. 그럼에도 아정은 그런 아버지를 동정했고, 아버지를 업신 여기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아들을 낳지 못해 자신이 벌을 받는다’는 자격지심을 안은 어머니는 계속해서 딸인 아정에게 자신의 회한을 덧씌운다. 남편과 아버지의 부재, 그 속에 남은 두 여성 간에도 여전히 가부장제는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서로를 곪게 하는 모습이 조금은 안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