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록(貫祿)
: 오랜 기간 동안 동안의 직업이나 직책에서의 경험으로 인하여 생긴 권위.
한국 사회는 참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식민 지배, 전쟁과 분단, 군부 독재와 민주화 운동, 그리고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물결까지. 한 세대의 삶은 다음 세대와 크게 달라졌고, 우리는 수많은 과거를 버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다면 격변의 시대 속에서 한국 영화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질문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얼굴은 바로 김혜자와 윤여정, 두 명의 대배우다. 이들은 한국 영화가 시대와 공명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독창적인 철학과 세계를 쌓아왔다. 김혜자는 <만추>의 가련한 여주인공부터 <마더>의 광기 어린 어머니까지 복잡한 인간상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한편, 윤여정은 신인 시절 <화녀>에서 파격적인 연기로 여성 인물의 관습을 깨뜨리고, <미나리>로 세계에 한국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각인시켜 연기 스펙트럼을 끊임없이 확장해 왔다.
장장 60여 년에 달하는 김혜자와 윤여정의 필모그래피는 단순한 연기의 기록을 넘어, 시대와 함께 변화한 여성과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한다는 의의를 가진다. 가부장 질서 속 전형적인 여성상에서부터 이를 과감하게 전복하는 시도까지, 두 배우의 행보는 한국의 여성 이미지가 어떻게 수용되고 묘사됐는지, 한국 사회가 어떤 흐름으로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로 남았다.
오랜 세월 속 '한순간도 허투루 연기한 적 없다'는 굳센 연기 철학은 배우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이상의 숭고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한 명의 예술인으로서 직업에 바친 깊은 헌신을 의미하며, 그들이 걸어온 길은 현대 한국 영화사의 중요한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번 기획에서는 두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한국 영화가 어떻게 시대와 함께 변해왔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연기 세계를 넓혀왔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수많은 감독의 뮤즈이자 영감이 되어왔던 김혜자와 윤여정의 필모그래피를 따라서, 오랜 시간 쌓아온 두 사람의 깊은 ‘관록’, 각기 다른 색의 노련한 연기력을 함께 감상해 보자.
“저는 그냥 제 할 일을 하는 거예요. 한순간도 허투루 연기한 적 없어요. 할 줄 아는게 연기 밖에 없어요. ‘저 사람은 아무 것도 못해’라고 해도 그게 사실이에요”
-김혜자, MBC ‘다큐플렉스-전원일기 2001’ 방송 中-
"전형적인 할머니,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전형적인 엄마, 나 그런 것 하기 싫어요. 내가 조금 다르게 하고 싶어요.”
-윤여정, 2020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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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봉준호 | 2009 | 128' | 목요일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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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나물처녀
김초희 | 2016 | 29' | 목요일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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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는 복도 많지
김초희 | 2020 | 96' | 목요일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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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주는 여자
이재용 | 2016 | 110' | 금요일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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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정이삭 | 2021 | 115' | 금요일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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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춤사위, 광기 어린 눈빛, 설득력을 부여하는 음성, 김혜자라는 주인. ‘어머님’과 ‘오빠’만 존재하는 세상이 가짜이길 바랄 때 비로소 연기임을 인지하게 된다. 우리는 짙게 드리워진 사랑의 그림자 아래 여성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소상하게 일러바칠’ 필요가 있다.
명신약재의 혜자에게는 스물여덟 해 동안 키운 것치고 조금 많은 뒤치다꺼리를 안겨 주는 아들 도준이 있다. 그를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은 하나가 아니다. 때로는 잘못을 도준에게 전가하고, 혜자에게 분노를 쏟고 돈을 뜯어가지만 도준에게 참 든든한 친구가 되어 주는 진태가 있기 때문이다. 혜자는 뺑소니범에게 복수하려다 백오십의 빚을 떠안은 도준과 진태의 관계가 걱정스럽다.
그러나 도준이 다음으로 가져온 사건은 해프닝으로 넘겨 주기 어려울 지경이다. 취한 도준은 아정이라는 여학생을 따라다니며 희롱하더니 날이 밝자 문아정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 혜자는 형사와 변호사에 더해 아정의 가족에게까지 접근하지만 결백한 아들을 풀어낼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 직접 진범을 찾겠다는 혜자의 다짐은 새로운 기억과 사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도준은 다섯 살 적 엄마가 자신을 농약으로 독살하려던 것을 기억한다. 아정은 쌀을 받고 떡을 치는 ‘쌀떡소녀’였으며, 친구가 개조해 준 ‘변태폰’으로 자신과 잔 남자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기록해 두었다. 나는 이 자연스러운 전개가 익숙하다. 어머니의 희생이 (정도의 타당함을 떠나) 아름답다고 포장해 볼 만한 모성애에서 살인미수범의 속죄로 변질된다. 관객들은 혜자가 사용한 ‘론스타’가 도준을 ‘잘생긴 바보’로 만든 것이 아닌지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시작하고, 노고에 대한 책임은 자연이 아닌 어머니에게 얹어진다. 가뜩이나 미인박명의 예시 항목으로 취급되던 피해 여성이 원래부터 남자 좋아했어요, 낮잠도 혼자 못 잔대, 입방아에 오른다.
도준은 순수하다. 엄마랑 잔다는 대답이 어떤 것까지 함의하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는 늘 솔직하다. 진태의 눈에 ‘이거 내가 죽여 버렸다’며 빨래처럼 전시된 듯 보이는 시체가, 도준에게는 꼭 피를 흘리고 있으니 보고 병원에 데려가 달라는 시그널처럼 읽힌다. 도준이 기억할는지 몰라도, 그것은 길에 누워 있는 학생을 걱정하여 본인이 취해 둔 모양새이다. 붐비는 역사에서 엄마의 범죄 증거를 내밀며 이런 물건을 잃어버리면 어떡하느냐고 묻는다.
한편 도준은 순수하게 욕망한다. 갓 어른이 된 미나에게 다리가 예쁘네, 치마가 예쁘네, 집적인다. 밤길을 걸으며 여학생을 향해 오빠랑 함 하자고, 남자가 싫으냐고 외쳐 댄다. 관객은 “바보 같은 새끼” 소리에 발끈하여 우발적으로 아정을 살해하게 된 ‘좀 바보 같은’ 행동보다, ‘다 알고 하는 말 같은’ 대사에 더욱 불쾌감을 느낀다.
도준이 ‘바보’ 소리에 자유롭게 분노하며 사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기도원 종팔에게 없고 그에게만 있는 ‘마더’ 덕일 것이다. 도준의 삶에 포함되었어야 할 정량의 억척스러움은 혜자에게로 가중되어 기어코 그녀의 손에 피를 묻힌다. 혜자가 종팔을 만나 처음으로 건네는 말 역시 인사나 범행 여부 대신 부모, 특히 “엄마 없어?”이다. 꼭 아들 같은 종팔에게 자신 같은 존재가 없는 것이 딱하다. 돌을 맞아 죽은 여자아이가 아니라, 그 십 대 소녀의 기구한 삶이 아니라 제 한 몸 바쳐 있던 죄도 없던 일로 사하여 줄 어머니가 없는 남성이 안쓰럽다.
왜냐하면 아들을 향한 혜자의 사랑은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혜자는 아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다른 여성 미선에게 ‘애 들어서는 약’을 권할 수 있다. 그 제안을 웃음으로 듣는 미선은 분명, 공무원인 남편의 명예를 위해 아들을 아주 올바르게 양육할 것이다.
독무로부터 시작한 〈마더〉는 한 무리 여성들의 군무로 맺힌다. 문득 나는 그을린 침 세트를 매만지던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도준의 억울한 목소리가 혜자의 귓가에 어느 순간 맺히더라도. 하지만 엄마는 난데. 세상천지에 엄마하고 나하고.
글쓴이 몽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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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설화와 신화를 엮어 만들어낸 귀엽고 사랑스러운 단편, <산나물 처녀>. 눈에 익는 배우들의 재치 있는 연기 변신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감독은 화창한 봄날에 재래시장에서 나물을 파는 한 할머니를 우연히 보며 영화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작고 마른 몸으로 쪼그려 앉아 나물을 다듬던 할머니의 모습은 감독의 눈에 퍽 고단해 보였다. 감독은 그녀를 고단함을 거두고자 <산나물 처녀>를 기획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미지의 행성에서 온 70세 노처녀, 순심(윤여정)이다. 순심은 짝을 찾아 지구로 날아온다. 하지만, 남자는 온 데 간 데 보이질 않고 숲속에서 혼자 나물을 캐고 있는 달래(정유미)만 보일 뿐이다. 달래는 남자를 구하러 지구에까지 날아온 순심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다. 그날 이후, 순심과 달래는 숲에서 나물을 캐가며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배유람)의 목숨을 건져준다. 너무도 감사한 마음에 사슴은 그녀들의 소원을 한 가지씩 들어준다. 그녀들의 소원은 바로 자신들의 짝을 찾는 것. 사슴은 홍제천의 두 선남(?)을 넌지시 귀띔해 준다.
<산나물 처녀>는 작은 들꽃처럼 사랑스럽고, 몽글몽글한 영화다. 김초희 감독이 빚어낸 사랑스러운 윤여정 배우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노년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정석적인 ‘할머니’ 이미지를 계속해서 벗어나는 그녀의 행보는 가히 독보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글쓴이 모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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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는 복도 많아, 집도 없고, 돈도 없고, 찬실이는 복도 많네...’
찬실은 영화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방에서 상경한 그녀의 젊은 날은 영화로 가득했고, 돈도, 명예도, 사랑도, 집도 없이 그녀는 오직 영화와 함께 했다. 그러나 인생의 성적표가 찾아온다는 나이 마흔에, 그녀에게 돌아온 성적표는 어딘가 많이 초라하다. 예술가의 삶은 왜 이리 고달플까.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 저는 늘 목말랐던 거 같아요. 사랑은 몰라서 못했지만...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이 저를 꽉 채워줄 거라고 믿었어요. 근데 잘못 생각했어요. 채워도 채워도 그런 걸로는 갈증이 가시지가 않더라고요.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에요. ...저요,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불혹이 되어서, 뭐 하나 내세울 것 없이 자꾸만 변두리로 밀려나는 찬실의 삶은 애잔하다. 조금은 희망차 보이던 연애 사업조차 어그러지고, 유망주였던 지감독의 작품도 갑자기 와해되어버리고, ‘복 많은’ 찬실의 삶은 모순적이게도 잘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럴수록 그녀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그 안에는 애증스러운 영화가 있다. 그녀에게 영화란, 이미 하나의 삶이자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고달프지만 발랄한 찬실의 삶은, 어쩌면 더욱더 단단한 예술인이 되어가는 길목일지 모른다.
글쓴이 모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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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은 ‘죽여주는’ 박카스 할머니이다. 그녀는 MTF 트랜스젠더 티나가 세를 놓은 집에서 코피노 소년 민호를 데리고, 의족을 사용하는 가난한 피규어 제작가 도훈과 이웃사촌으로 살고 있다. 공원에서 노인들에게 박카스 판매를 빌미로 접근해 성매매를 하는 소영은 남다른 솜씨로 주위 여성 노인들의 시샘을 사며, 하루는 단골이었던 세비로 송과 재봉한다. 고객 중 나름 매너 있는 신사였던 이가 손 하나 까딱 못하는 상태로 늙어 있다. 대소변마저 타인의 손에 맡겨야 하는 중풍 환자 송 씨는 소영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이를 시작으로, 소영은 ‘죽여 주는’ 자살 조력자가 된다. 한때 그녀를 통해 성적 욕구를 해소하며 살아 있다는 감각을 맛보던 노인들은 한층 노쇠해진 채 본인과 주변인의 좌절스러운 처지를 호소한다. ‘죽는 게 나은 삶’이란 너무도 비참해서, 간혹 남성들과 소영 사이 과거를 망각한 채 안쓰러운 마음이 피어나기도 한다. 소영 역시 같은 이유로 농약병을 들고, 타인의 등을 떠밀고, 화려한 호텔 침대에 누워 주었는지 모른다.
세비로 송의 입에 농약을 부어 넣는 장면은 연작 소설이었어야 할 것이 3인칭 장편 소설로 쓰이고 말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되는 기점이다. 서술의 초점과 세상의 짐이 모두 소영에게 집중된다. 어릴 적 식모살이를 하다 공장에 들어갔고, 이후에는 동두천 미군 부대에서 소위 말하는 ‘양공주’ 생활을 한 소영이 ‘감히’ 박카스 할머니들을 취재하겠다고 찾아온 기자에게 쏘아붙인다. “다들 손가락질하지만 나 같이 늙은 여자가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일이 많은 줄 알아?” 다양한 선택지 사이에서 성매매를 골라 응당한 혐오를 받는 것 아니냐는 물음은 소영의 삶 속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소영이 ‘죽기보다 싫다’고 표현한 빈 병이나 폐지 줍기를 통해 벌어들일 159,000원*으로 스스로를 지탱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또한 그녀는 자기 직업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아도, 다른 노인의 ‘친구’로 소개받아도 그 며느리에게 ‘꽃뱀’으로 취급받는 사회적 지위를 지녔다. 봄보다 앞서 등장한 유골함에 쓰인 이름은 소영이 아닌 무연고자 양미숙. 할머니, 이모님, 여사님 대신 사용되길 원했던 어린 이름 ‘쏘-영(So-Young)’은 손수 지은 가명이었다. 자꾸만 그녀에게 다가가 소영 씨, 불러 드리고픈 까닭은 이것이 영화에 등장한 그녀가 자의적으로 내린 몇 안 되는 선택이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가 여성 노인 하나를 이용해 여러 약자를 한꺼번에 보듬으려는 사이, 어물쩍 가려지고 만 그녀의 행로에 배우가 가히 더 큰 숨소리를 불어넣는다. 윤여정이 인생 연기로 인생을 논하는 작, 〈죽여주는 여자〉. 소영은 혼자서는 외롭고 비참하여 죽지도 못하는 남자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해 주었고,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다.
글쓴이 몽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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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언제나 괜찮을 수 없다. 큰 포부를 안고 시작한 일이라고 다 잘 풀리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될 것이라고 믿었던 일인데도 뒤통수 맞는 경우가 꼭 있다. 어떤 건 맞고 어떤 건 틀리고, 그래서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밖에 없다면 인생은 한 서너 배 정도 편해지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매일매일을 이렇게 고군분투한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나 미국으로 옮겨가 사는 영화 속 그들이나 마찬가지다. 어디에 살든, 누구와 살든, 어떻게 살든 그건 딱히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영화 <미나리>는 거창한 뭔가를 전하려는 영화는 아니다. 그냥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얘기다.
주인공 가족은 희망을 안고 미국으로 떠난다. 병원까지 가려면 차로만 한 시간 넘게 가야 하는 황무지 같은 곳에 놓인 컨테이너 하나. 그곳이 이 가족이 머물러 살아갈 곳이다. 미국 시골 구석의 넓은 땅에서 농사를 지어 파는 게 아빠 제이콥의 목표다. 미국에 한인 가족들이 점차 늘어나고, 그렇기 때문에 분명 수요가 있을 것이라 믿는 그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캘리포니아로 옮겨가자는 모니카의 만류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꿋꿋이 농사를 이어간다. 하지만 말했듯 모든 일은 바람대로 풀리지 않는다. 함께 살기 위해 미국으로 온 할머니 순자와 데이빗의 건강 문제, 게다가 물은 끊기고, 제이콥과 모니카의 다툼은 잦아진다.
병원에서 데이빗의 심장이 많이 나아졌다는 진단을 듣고, 제이콥의 농장이 한 거래처와 계약을 마친 뒤 이제 좀 잘 풀리려나 싶다. 하지만 결국 제이콥과 모니카는 눈물을 보이고 만다. 겉으로 괜찮아 보인다고 괜찮은 건 아니니까. 그들은 이미 자잘한 균열들에 지쳐있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만다. 순자의 실수로 집은 모두 불에 타버린 거다.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가고 그간의 수고들이 다 없던 일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아찔한 순간이지만 어쩌겠는가.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감에도... 실제로 하늘이 무너질 리는 없다. 상황이 안 좋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지고, 또 살만 하면 다시금 하락세를 타는 건 이제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워낙 익숙하지 않은가.
영화 <미나리>의 마지막, 데이빗과 앤은 순자의 양손을 꼭 잡아 이끈다. 카메라는 할머니 순자의 말대로 물가에 빼곡히 자란 미나리를 다시금 비춘다.
글쓴이 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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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뮤즈들🥀
안녕하세요, 도리입니다. 앞선 영화 네 편은 잘 보셨나요? 한국을 대표하는, 그야말로 한국의 뮤즈들이라고 할 수 있는 김혜자와 윤여정이라는 배우들이지만 우리에게는 조금 낯설 수도 있는 젊은 시절의 영화들을 볼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이제 두 번째 이야기는 엄마나 할머니 역할을 맡은 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대중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엄마나 할머니의 모습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구하여 자신들만의 이야기와 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이번 영화 다섯 편도 잘 감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주는 추석 연휴로 인해 시네마떼끄는 한 주 쉬어갑니다. 다들 맛있는 음식🍚과 함께 즐겁고 풍족한 한가위를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새로운 기획과 함께 뉴스레터로 찾아오겠습니다☺️~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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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시네마떼끄
ewhacinemathequ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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