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지나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시점에, 우리는 다시 한번 출발선에 섰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이전과 달라진 우리는 미지의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얼마나 나아졌을까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모릅니다. 나 자신도, 영화 속 인물들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걷습니다. 넘어져도 보고, 무릎이 까져도 보고, 다시 일어나서 걸을 테지요. 멀리멀리 걷다 어느 순간 뒤돌아보았을 때, 우리가 출발했던 곳이 작은 점으로 남아 있다면. 그때 우리가 있을 곳을 스스로 정해 봅시다. 고개를 들어 해를 마주하고 다음의 행선지로 걸어 봅시다. 여기, 우리와 함께 걸을 네 편의 영화들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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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의 해부
Anatomy of a Fall
쥐스틴 트리에 | 2023 |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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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
목요일 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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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드림
Robot Dreams
파블로 베르헤르 | 2023 | 102’
금요일 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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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은 누구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연출과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이 공명하는 영화, <괴물>
첫 시퀀스는 밤의 어둠 속에서 불타는 빌딩을 구경하는 무기노 미나토와, 그의 엄마 무기노 사오리를 비춘다. 타오르는 화염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뱉는 미나토. 그 후로 미나토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해지며 두 사람의 세계엔 차츰 불온함이 번져 간다. 어느 순간부터 미나토가 무언갈 숨기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싱글맘 사오리는 불안해진다. 아들에게 난 상처를 보고 더 이상 모른 체 할 수 없던 사오리가 미나토를 추궁하자, 미나토는 새로운 담임 ‘호리’에게 폭력을 당했고, ‘자신의 뇌가 돼지 뇌’라는 폭언을 들었다고 고백한다. 사오리는 곧장 항의를 하러 학교에 방문하지만,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은 피해를 입은 미나토에 대한 고려 하나 없이 일절 고개 숙여 사과만 한다. 그 와중에 호리 선생은 당사자로서 죄의식이 일절 없고, ‘한부모 가정에선 자주 있는 일’이라며 사오리의 신경까지 긁는다. 심지어 왕따를 주도하는 건 미나토 쪽이고,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히고 있다는 말까지 전한다. 대체 이들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관객은 이미 ‘괴물 찾기’를 시작했지만, 영화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형국으로 빠져든다.
“실제로 어땠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어” 이 영화는 비록 하나의 사실일지라도, 그 사실은 사람의 수만큼 존재한다는 걸 보여준다. 같은 산도 어떤 위치에서 보는지에 따라 다른 것처럼, 같은 세상에서도 내가 보는 대로 남이 보고 있는 건 아니다. 같은 세계 속에서도 각각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어머니 사오리에게 교사나 학교 측은 불량하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악’이다. 하지만, 호리 선생은 평범하고 따뜻한 초임 교사였고, 미나토와 벌어진 폭력도 단지 실수로 팔이 닿은 것이었으나,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학교 측과의 괴리가 뒤엉켜 하나의 사건도 시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게 된다.
<괴물>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과도 비슷하다. <라쇼몽>은 사무라이, 그의 아내, 산적 이 세 명의 엇갈린 진술을 통해 진실을 알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며, 사실이란 얼마나 다면적인지, 우리가 믿는 현실에 얼마나 사각지대가 많은지를 보여주었다. ‘사실이란 개인의 인식에 불과하고, 그 사람의 수만큼 존재한다’라는 주제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앞선 2017년에 <세 번째 살인>에서 녹인 바 있다. <괴물>은 가족 담론에 대해 깊은 연출을 이어온 고레에다 감독의 세계에 다시금 이 주제를 예리하게 투영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글쓴이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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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스틴 트리에 | 2023 | 151’
수요일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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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는 말이 없다. 과묵한 그들은 때때로 산 자들을 괴롭거나 외롭게 만든다. 평온할 줄로만 알았던 어느 하루, 유서 한 장도 없이 남편이 추락했다. 산드라의 가정은 순식간에 도마 위에 올라 조각조각 해부당하고 재구성된다. ‘왜’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죽었는가? 혹은, ‘어떻게’ 죽였는가? 요점은 사건과 사건 간의 사실관계. 하지만 인물 각자의 관점에서 멋대로 부풀려지거나 생략된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문득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은 사건의 조각들일 뿐, 그 사이의 인과는 누군가의 입장에서 덧붙여진 소설에 가까운 것이라는 생각이 피어오른다. 그 누구도 진짜 사건의 전말에는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의심과 함께 말이다. 이 재판의 끝은 어딜 것인가.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실인가. 산드라는 정말로 남편을 죽였을까. 다니엘의 믿음은 진실에 의거한 것인가. 진실이란 얼마나 얄팍한가. 그 답 또한 자신만의 이야기로 해석할 관객의 몫일 것이니. 다만 확실한 것은 진실과 믿음은 결코 나란히 놓일 수 없다는 것. 당신의 믿음 중 참인 것은 얼마나 되는가?
글쓴이 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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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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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러운 초록색의 잔디와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 하얗게 페인트칠이 된 덕에 햇살로 빛나는 2층집. 마치 한 편의 그림과도 같은 이 풍경 속에 한 가족이 살고 있다. 정원을 돌보는 취미가 있는 엄마, 일이 바쁘지만 아이들에겐 자상한 아빠, 서로 사이좋게 노는 아이들. 만약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가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벽과, 때때로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들이 없었다면 동화에 나올 법한 가족들이라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벽과 연기가 때때로 우리의 시각을 방해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가족의 일상은 평화롭고, 아름답게만 보인다.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것과 존재하는 것의 상관관계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이에 의심을 불어넣는 것은 두 귀로 들려오는 소리일 것이다. 이런 소리에 익숙해지면 감각이 무감하게 될 수 있지만, 억지로라도 귀를 열어 영화를 보게 된다면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을 느끼게 될 것이다.
글쓴이 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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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베르헤르 | 2023 | 102’
금요일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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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you remember?” 도그는 오늘도 외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도그는 외로움을 달래줄 로봇을 구매한다. 로봇은 사용자의 친구가 되어 외로움을 달래주는 안드로이드다. 도그는 로봇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날씨 좋은 여름, 도그와 로봇은 바다로 물놀이를 간다. 그런데 갑자기 해변에 누워 쉬던 로봇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도그는 어쩔 수 없이 로봇을 그대로 두고 해수욕장을 나온다. 다음 날 로봇을 찾으러 온 도그는 해수욕장이 내년 여름까지 폐장한다는 공지를 발견한다. 도그는 로봇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로봇은 도그를 생각하며 꿈을 꾼다. ‘로봇 드림’이다. 발랄한 그림체의 영화는 지나간 쓰라린 인연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로봇 드림’은 각자의 ‘드림’을 가진 관객들에게 지나간 관계를 바라볼 하나의 시선을 제안한다.
글쓴이 순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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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ENTARY
with 이화시네마떼끄
#9: <한국이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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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며, 어떻게 살아야 보람을 가지고 살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날에 날마다 눈으로 보고 느끼고 치르는 모든 따위의 일이라면 아무런 뜻도 거기서 찾지 못한다.’ - 최인훈의 소설 『광장』(1960) 中.
우리는 종종 하늘을 올려다보며 일상에서 벗어난 비행기를 바라본다. 누군가 그 속에서 이 바쁜 삶을 떠나 어디론가 향하고 있음을 떠올리며, 우리도 떠나고 싶다는 막연한 충동을 느낀다. 이때 속으로 조용히 떠오르는 문장 하나.
“나도 한국 뜨고 싶다.”
이 말은 단순한 푸념을 넘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집단적 정서를 담고 있다. 장건재 감독의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바로 이 현실에서 출발한다. 2015년 장강명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동시대 한국 청년들의 무기력과 좌절, 그리고 탈출의 욕망을 조용히 추적한다.
영화는 주인공 계나(고아성)가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오르는 첫 장면으로 시작된다. 한국을 떠나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계나는 말한다. “난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울음이 먼저 나왔고, 인천역에서 강남역까지 2시간이 넘는 출근길은 지옥과도 같았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입김이 새어 나오는 차가운 방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하는 날들의 반복. 계나는 한국의 시리도록 차가운 겨울이, 숨 막히는 일상이 너무나도 싫었다.
한 발 떨어져 보면 계나는 겉으로는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강남권 금융회사에 다니며 학자금 대출을 다 갚은 20대 여성. 누군가 보기엔 충분히 성공적인 삶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녀의 내면은 그렇지 않았다. 계나는 스스로를 아프리카의 톰슨 가젤, 늘 포식자에게 쫓기는 존재처럼 느꼈다. 한국에서의 삶은 그녀를 끝없이 낭떠러지로 몰아세우는 듯했고,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뉴질랜드는 계나에게 단순한 이주지가 아닌,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자유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영화는 계나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감독은 재개발 대상지인 집에서 추위에 떠는 계나의 모습을 비추거나, 숨막히는 출퇴근길의 순간을 느리게 포착하며 시각적으로도 청년들의 고립감을 강조한다. 뉴질랜드에서의 장면들은 확연히 다르다. 밝은 햇살과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는 계나의 해방감을 상징하며, 그녀가 처음으로 숨을 쉬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 대비는 관객으로 하여금 계나의 선택을 더욱 이해하게 만든다.
계나의 이야기는 『광장』의 이명준을 떠올리게 한다. 이명준은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이상향을 찾아 떠나지만, 끝내 자신이 원하는 유토피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다에 몸을 던진다. 계나 역시 한국이라는 공간이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는 메마른 땅이라 느꼈다. 『광장』 속 명준의 시대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낳은 비극이었다면, 계나의 시대는 과도한 경쟁과 사회적 압박이 청년들을 숨 막히게 하는 또 다른 비극의 시대다. 높은 빌딩이 들어서고 기술이 발전해도, 청년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두 발바닥만 겨우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좁은 공간으로 남아 있다.
계나의 탈출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다. 이는 ‘어떻게 살아야 보람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그녀의 진지한 물음이다. 뉴질랜드는 계나에게 새로운 광장이지만, 영화는 이민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 아님을 암시한다. 새로운 땅에서도 계나는 여전히 직업, 인간관계, 삶의 의미를 고민한다. 결국 그녀가 찾아야 할 진정한 광장은 특정한 장소가 아닌, 그녀의 내면과 주변의 관계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결국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한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출발점인가, 아니면 숨 막히는 감옥인가? 계나의 선택처럼 우리 각자도 자신만의 ‘광장’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발 딛고 있는 곳에서도 우리만의 작은 광장을 만들 수 있는 용기일 것이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그 고민의 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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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선선해지고 햇빛은 따스해진 날에🍂
여러분 안녕하세요. 새롭게 뉴스레터를 담당하게 된 도리입니다. 다들 방학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이번 여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변덕스러운 날씨로 가득했던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외출할 때면 항상 삼단우산을 지닌 채로 외출을 했는데요, 그래서인지 이 우산의 덕을 본 날이 꽤나 많습니다. 바람은 더 이상 후덥지근하지 않고 선선하며, 햇빛은 따갑지 않고 따스해져 가을이 오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요즘이지만 아직까지는 방심하지 마시고 우산을 항상 지니고 외출하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또한 추위를 많이 타시는 분들은 꼭 바람막이도 챙겨 다니시기를 추천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방학 동안에 시네마떼끄 부원들과 함께 24-2학기 상영을 위한 세미나도 열심히 진행하고 준비했답니다. 모두 하나같이 좋은 기획안과 영화들이니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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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시네마떼끄
ewhacinemathequ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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