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는 서커스단장 아버지와 종교 지도자 어머니를 둔 아이다. 어머니 콘차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로, 두 팔이 잘리고 강간당한 소녀 리리오가 죽으며 만들어진 피 웅덩이를 성전으로 모신다. 그러나 사이비로 몰리고 결국 성전은 부서지고 만다. 성전을 잃은 종교는 뿔뿔이 흩어지고, 어머니는 다시 피닉스와 남편이 있는 서커스로 돌아온다. 돌아온 콘차에도 그의 남편은 여전히 여색을 즐긴다. 콘차는 서커스단원과 유흥하는 남편에 격노해 침실에 찾아간다. 그는 성기에 화학약품을 부어 지져버리고, 남편은 복수하듯 그녀의 팔을 자른다. 줄곧 그녀가 모셔 온 성녀 리리오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성인이 된 피닉스는 어머니와 한 몸이 되어 펼치는 공연을 하며 살아간다. 팔이 잘린 어머니 뒤에서 투명 인간처럼, 콘차의 의지에 따라 손은 움직인다. 빨간 가짜 손톱을 붙인 손은 피닉스가 모르는 피아노곡을 유려하게 연주하고, 원치 않는 살인을 저지른다. 명령은 결코 거부될 수 없다. 그는 젊은 여성들을 살해한다.

   피닉스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의 모습에 매혹된다. 아버지의 옷을 입고 아버지의 묘기를 부린다. 그러다 젊은 여성을 살해하고 괴로워하지만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시체를 매장한다. 그는 아버지의 그림자와 어머니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피닉스는 투명 인간이 되어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나 현실은 쉽지 않다. 인조손톱을 붙인 그의 손은 그만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피닉스와 관객들은 동시에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실체가 아닌 망령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어릴 적 서커스단에서 함께 했던 소녀 알마를 통해 피닉스는 어머니의 마네킹과 조우한다.

살해당한 어머니와 자살한 아버지를 목격한 밤 주인공의 결핍은 만들어진다. 피닉스는 아버지의 욕망을 실현하고, 동시에 어머니에 의탁하여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본인이 저지른 살인이 본인의 것임을 끝내 인정한다. 그리고 기뻐 보이는 표정으로 경찰에 자수한다. 어머니 형상의 마네킹은 불타 사라지고 만다. 내 손으로 저지른 나의 죄, 그는 읊조릴 것이다. 피닉스는 더 이상 여자 괴물의 환상에 사로잡힌 불쌍한 남자가 아니다. 그는 기쁜 얼굴로 본인의 죄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믿어온 형상을 깨뜨린다. 우리는 어떻게 본인이 되는가. 피닉스의 맨손톱을 보고도 묻지 않을 수는 없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 2015 | 119’

“당신은 그럼에도 이 삶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나요?”

“네.”

“그게 무엇이었나요?”

“내가 지구상에서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

   문구와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우리는 때때로, 혹은 자주 자기 객관화, 자아 성찰을 넘어선 자책을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리건 톰슨이 과거 그가 연기했던 버드맨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나, 허공에 붕 뜬 채로 명상 자세를 하거나 제스처만으로 문을 닫고, 화가 나 전구를 깨는 것들이 마냥 낯설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우리 모두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을 해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초조할 때마다 내면의 목소리가 괜히 나를 부추기는 것만 같고, 모든 걸 다 내려놓고 가만히 앉아 원하는 것들이 다 내 맘대로 이루어지는 상상을 말이다.

   영화 <버드맨>은 과거 ‘버드맨’으로 유명해진 배우 리건 톰슨이 연극을 준비하며 겪는 혼란을 다룬다. 그는 가진 모든 것들을 바쳐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준비한다. 하지만 그가 기대했던 것과 반대로 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급하게 구한 대역 배우와의 계속되는 마찰, 연기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방황. 대중의 시선 등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넘쳐나고, 그는 점점 과거 ‘버드맨’이었던 시절에 얽매이게 된다. 잠잠할 날이 없고, 영화는 내내 시끄럽다. 생각보다 연극은 흥행했다. 그에게는 시련이었던 일들이 오히려 좋게 작용하며 결국 극장 앞에 줄을 한참 서야 볼 수 있을 만큼 극은 잘됐다. 하지만 끊이지 않는 드럼 사운드와 함께 내면의 혼란은 잦아들 줄 모른다.

휘황찬란한 빛들과 고조되는 드럼 사운드를 배경으로 그는 무대 위에서 쓰는 총이 아니라 진짜 총을 겨눈다. 화를 내거나, 물건을 부수고, 주변인들에게 짜증을 내고, 인상을 잔뜩 쓴 채로 어딘가 불편하다는 듯이 성큼성큼 걷는 등 항상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직접적이었던 그의 심리 묘사가 잠시 뚝 하고 끊기는 때다. 그 이후로 영화는 점점 안정을 찾아간다. 나열할 수 없는 복잡한 일들은 병실 창에서 날아오르는 장면에서 정리되며, 그제야 모든 소음이 잦아든다.

   캐롤은 새로 이사한 집을 꾸미는 데 여력이 없다. 침실의 분홍색 침구와 벽지, 청록색 조명. 어울리는 톤에 맞춘 가구들은 하나둘 인부의 손을 타고 제자리에 놓인다. 모든 게 정상적인 집안에 검정 소파가 잘못 배달되며 이변은 시작된다. 캐롤에 의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주문되었을 리 없는 이 소파는 불편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 가정의 주부인 그녀는 집안을 가꾸고, 에어로빅에 다니며, 비슷한 계층의 친구들을 사귄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교류하며 미용 정보나 건강 정보를 주고받으며 때때로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연다. 기분 전환을 위해 미용실에 가서 머리 모양을 바꾸고 매니큐어를 칠한다. 가구의 색을 맞추고 맞지 않는 가구를 교환한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는 듯 매끄럽게 이어지는 동안 캐롤만이 태연하지 못하다.

   캐롤의 주 증상은 두통, 코피, 호흡곤란, 발진이다. 처음에 병원에 간 캐롤은 수십 가지 알레르기 검사를 받고 여러 가지 식이 요법을 처방받는다. 과일 다이어트를 그만둘 것, 우유와 유제품 섭취를 멈출 것. 그러나 증세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새것 냄새가 나는 소파, 흰 페인트칠을 하는 인부들, 매니큐어와 파마약, 새집의 냄새와 기계의 웅웅거림…. 누구도 인정하려들지 않지만,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변화가 캐롤에게 일어나고 있다. 그녀는 병원에서 여러 번 진단받는다. 그러나 캐롤의 언어는 곡해 없이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거듭된 내원 끝에 겨우 ‘환경 질병’이라는 병명을 얻어내고서도 그는 안전하지 못하다.

   캐롤은 비슷한 증상을 겪는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치료 공동체로 옮겨간다. 렌우드 센터에서 비슷한 증세의 환자들과 경험을 나누고, 그동안 겪어왔던 불편함을 토로하는 사람들에 귀 기울인다. 동질감, 동시에 안정감을 느낀 캐롤은 유별나다는 취급 없이 편안하다. 그럼에도 발진은 가라앉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의 병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어떤 생각이 자신을 환경 질병이라는 틀에 가두고 있었는지를 토로한다. 병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어렵게 털어놓는 사람들, 왜 아픈지를 자기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사람들. ‘그게 누구든,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쏴버리고 싶다’는 이 앞에서 ‘그건, 병이 그렇게 할 수 있게 둔 당신 자신 때문이’라고 말하는 남자. 그러나 무엇이든 회고적으로 원인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일정 부분 믿음의 형태를 띠고 있을 것이다. 모든 증상들은 언어가 되는가? 어떤 증상들은 구체적인 단어로 뱉을 수 없다. 설명될 수 없다고 해도 나, 화학 물질, 고통은 자주 실존한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형형히 느낀다.

   그건 캐롤의 생일에 얼어붙어 그녀를 쏘아보는 사람들의 시선과는 무척 다르다. 질병을 질병으로 대할 것. 사람들의 마음, 에이즈, 다른 형태의 질병들처럼. 상표를 읽고 빌딩 속으로 들어가…. 말끝을 흐리지 않고 끝마치게 두는 것. 숲과 인접한 고속도로의 경계를 인식하는 것. 물질과 정신의 문제를 얼버무리지 않는 것.

결국 어떤 진단도 캐롤의 상태를 명확히 짚어내지 못한다. 과잉 반응, 스트레스, 자기 암시적 신체화 증상…. 그는 도시의 병원에서 의학적으로 증명된 검사를 받아보기도 하고 아예 원인 물질에서 떨어져 숲속 치료센터에서 치료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증세를 명확히 마주하고 실체로서 명명하고자 하는 캐롤의 시도는 번번이 거절된다. 오히려 타자로서 그를 노려보는 이들의 시선이 따갑다. 그러나 어떤 언어로도 설명될 수 없다 하더라도 캐롤의 증세는 실존한다. 어느 곳도 안전을, 완벽한 치료를 담보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거울을 바라보겠다. 그녀는 안전한가? 그렇지 않다. 그 어디에서도 결코 그럴 수 없었다. 그 모든 사실과 함께 캐롤은 여기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