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세계는 합리적인 것, 잘 정립되어 빈틈없는 법칙,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매끄럽게 굴러가는 무엇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구가 평평하다는 사람들의 말처럼 비합리적이고 껄껄한 것, 세간의 인식에서 미끄러지는 믿음 역시 세계의 일부다. 우리는 합리성 아래에서 무엇이든 매도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믿는다는 사실 자체를 자기 삶의 토대로 삼아 살아간다. 남들이 보기에 비웃을만한 것, 비합리적이고 어처구니없는 것일지라도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진실이 있는 법이다. 누구도 그들의 믿음을 함부로 폐기할 수 없다. 적어도 스스로 긴 터널을 통과할 때까지. 어떤 비합리적 믿음은 때때로 가장 견고하게 세계를 구성한다.
이단의 믿음을 통과하며 세상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또는, 변하지 않은 세상 아래의 균열을 광신도들은 어떻게 마주하는가? 이 믿음은 ❶ 진실을 담지한다. ❷ 터무니없는 거짓이다. ❸ 끝까지 알 수 없다. 세 가지 선택지 앞에서 영화들은 길을 헤맨다. 그러나 진실이 오롯한 진실일 수는 없는 법이다. 거짓이 그러하듯이. 믿음은 어떤 음모론, 유사 과학, 망상보다도 중요하다. 오직 믿는다는 그 사실만이. 싸구려 맹신을 우리는 비웃을 수 있다. 그러나 이성과 합리라는 신화는 또 어디에 기인한단 말인가? 이야기는 돌고 돈다. 결국 우리는 지켜보는 수밖에는 없다. 세상 어떤 과학과 이론보다도 그럴듯한 편집증을.
|
|
|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Dr.Strangelove: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
화요일 2시 |
|
|
돈룩업
Don't Look Up
아담 맥케이 | 2021 | 139’
|
|
|
화이트 노이즈
White Noise
수요일 2시 |
|
|
욕망
Blow-Up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 1966 | 111’
수요일 5시 |
|
|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Dr.Strangelove: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 |
|
|
보는 내내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입에 걸고 보다가도 어느 순간 싹 정색하게 되는 씁쓸한 맛. 그리고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폭발 장면에서 베라 린의 ‘We’ll Meet Again’의 선율이 흘러나오며 어디에서,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맑은 날에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라는, 이 장면에서는 전혀 달갑지 않은 가사가 귀에 꽂히는 순간. 이런 요소들이 이 영화를 설명한다.
미 공군 기지의 잭 리퍼 장군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소련에 핵무기를 발사하라는 R작전을 지시한다. 그런데 소련에 핵폭탄이 발사되면 소련이 개발하던 무기, 일명 지구 최후의 날 기계가 작동해 전 지구가 핵폭발의 피해를 입게 된다. 이에 미국과 소련의 고위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긴급회의를 가진다. 하지만 의견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그들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듯하지만 대화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다. 그렇게 방사능의 피해와 폭발을 막기 위해 머리를 싸매던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핵폭탄을 실은 폭격기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유유히 시간이 멈춰 있는 것만 같이 고요한 허공을 가른다. 이 장면은 오프닝을 상기시킨다. 보통의 전쟁 씬 같으면 소리만 들어도 폭력적인 듯한 굉음이 들리기 마련인데, 폭격기가 하늘을 나는 오프닝의 장면에서는 소음 대신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이 흐른다. 완전히 생략되어 버린 전쟁의 참혹함에 의아함을 느끼기 직전, 우리는 아름다운 음악과 화면 구성에 시선을 뺏겨버린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의 제목이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인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등장하는 건 영화의 중반부에서부터고, 심지어 대사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휠체어에 앉은 그는 영화를 끝까지 일관성 있게 이끈다. 광산에 들어가 숨어 살아야 하고, 남자 한 명에게는 열 명의 여자가 필요하며, 엘리트층만이 그곳에 갈 수 있다고. 그렇게 멸망 직전의 순간까지도 헛웃음을 짓게 만드는 말들을 구구절절 늘어놓고는 총통에게 ‘내가 걸을 수 있다니!’ 한 마디를 내뱉는다. 그와 동시에 화면을 장악하는 핵폭발 장면과 전주는 해소되지 못한 찝찝함을 그대로 간직하게 한 채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글쓴이 도라
|
|
|
아담 맥케이 | 2021 | 139’
화요일 5시
|
|
|
당신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밥을 먹고, 좋아하는 영화를 다시 보고, 친구들과 추억을 되새기고, 멀리 사는 지인들을 만나고, 아마 몇십 년을 산 인생을 마무리하기엔 하루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살아오며 수많은 지구 멸망설과 마주했다. 그 황당무계한 말들을 들을 때마다 별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설마….’하는 생각을 품으며 정말 지구가 사라진다면 난 오늘 무얼 해야 할지 상상해 본 적 있을 것이다.
영화 <돈룩업>은 이러한 상상을 뒤받쳐주듯 아주 유쾌하지만 씁쓸한 방식으로 지구 멸망을 다룬다. 이 영화는 얼핏 보면 보편적인 재난 영화처럼 아주 심각한 내용의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안을 들여다보면 블랙코미디로 버무려진 인류의 마지막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멸망을 겪으며 보이는 정부의 무능함, 철저히 외면되는 개인의 의견, 자신의 생존을 위한 무책임, 이 다양한 멸망의 양상은 우리에게 사회 풍자적인 메시지를 던져준다. 아마 당신은 이 영화를 보며 멸망이라는 슬픔보다 먼저 오는 조소와 함께 과연 우리의 삶에 있어 정말 중요한 건 무엇일까라는 궁극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영화 안에서 ‘멸망’에 대한 반응은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진다. 인류와 함께 한 우리의 행성 지구가 사라진다는 의견은 처음엔 황당한 음모론처럼 여겨지며 묵살당한다. 충돌의 실마리를 찾은 과학자들의 의견은 대통령의 말 몇 마디에 그저 루머에 불과해지고, 오히려 확실성 없는 얘기라며 화살은 과학자들을 향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태도가 멸망을 인지하고 바뀐다? 그건 애석하게도 우리의 희망에 불과하다. 물론 정부의 태도가 초반과 달라지기는 한다. 하지만 무능력한 정부는 충돌을 막아보겠다고 무언갈 하려 하면 그마저도 삐걱거리고 어딘가 엉성하며 하나의 코미디 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결국은 그들의 생존만을 생각하며 인류를 위한 이타적인 방향의 생각은 뒷전이 되어버린다.
결국 수많은 인간들은 각자의 엔딩을 맞이한다. 이젠 더 이상 지구의 멸망을 막을 수 없고 그저 인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가만히 앉아 끝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을 때 인류는 자신의 마지막 가치를 지키고자 노력한다. 누군가에게는 그 가치가 가족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일, 또 누군가는 국민에 대한 책임감, 누군가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가장 일상적인 시간일 지도 모른다. 결국 완전한 엔딩이 내 눈앞에 다가왔을 때 그제야 내가 놓쳤던 소중함이 보이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도 마지막 순간에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킬 수 있길 바라며, 영화 <돈룩업>이 보여주는 지구 멸망설을 즐기길 바란다.
글쓴이 융털 |
|
|
영화는 영화 속 자동차 충돌과 미국식 낙관주의의 상관관계를 소명하며 시작한다. 영화 <화이트 노이즈>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스 유출 사고를 경험하고 변화해 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주인공 잭 글래드니는 저명한 히틀러학 교수로, 학계에서 명망 높으며 강의할 때는 늘 선글라스를 끼는 버릇이 있다. 그는 세 번의 이혼과 네 번의 결혼을 통해 만난 아내 바벳, 둘의 아이들 넷과 함께 살고 있다.
이야기는 크게 두 줄기로 흘러간다. 사고로 나이오딘 D라는 정체 모를 화학물질에 노출된 이후의 삶, 그리고 바벳이 모두에게 숨기는 약물의 정체. 약의 정체를 추궁하던 잭은 진상을 알아내는데, 바벳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소하고자 약을 찾았던 것. 결국 그는 수상한 그 알약이 임상실험 중 실패한 약물임을 알게 된다.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바벳과 잠정적 죽음을 선고받은 잭. 공원 계단을 아래로, 위로 뛰어다닐 만큼 건강한 바벳과 싫어했음에도 온갖 검사를 받으러 다니는 잭. 가스 누출 사고 이후로 이들은 어딘가 달라졌다. 그는 유독가스 유출 사고 당시에 누구보다도 무감한 모습을 보였고 누구보다도 긴 시간 가스에 노출된다. 잭은 그가 ‘빠르면 20분 후, 길면 15년’ 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진단을 받는다. 도대체 이런 무책임한 선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제 잭은 전보다 자주 죽음에 대해 떠올린다. 그러나 영화는 그의 증상에 크게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어쩌면 오히려 ‘가시적인 변화 없음’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인물들만큼이나 자주 죽음에 대해 떠올린다.
잭은 어쩌면 전과 똑같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의 건강도 가정도 평화를 되찾아 가니까. 그는 재직하는 학교에서의 히틀러 학회를 무사히 마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파티에 참석한다. 아이들은 전만큼 호기심 많지만 전보다 덜 다투고, 아내 바벳도 그를 격려한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날 때나 데자뷰를 보았을 때 그는 주유소에서의 2분 30초, 그레이 씨를 쏜 허름한 모텔방을 떠올릴 것이다. 바벳이라고 다를 바 없다. 무리하게 얻어낸 향정신성 약물이 듣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을 것인가? 그는 여전히 상태가 호전되기를 꾀하는가? 잠깐, 죽음을 생각한다는 건 애초에 그런 식으로 작동하던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가족은 일상으로 돌아온다.
매번 가던 슈퍼마켓 사이를 글래드니 가족은 거닌다. 그들은 무설탕 껌과 일반 껌을 비교하고 요거트와 맥아를 구입하리라. 이제 지구는 원래 회전하던 방향을 찾았다. 잭의 친구 머레이는 ‘슈퍼마켓까지 전과 같다면 좋겠어’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슈퍼마켓을 이리저리 헤맨다. 바뀐 매대 사이에서 치리오 시리얼을 찾고, 프링글스 때문에 두리번거리고,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피넛 버터가 더 이상 거기 놓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찡그린다. 바뀐 매대의 위치에도 사람들은 익숙해질 수 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어떤 것들은 달라졌다. 아마도 영영.
글쓴이 견지 |
|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 1966 | 111’
수요일 5시
|
|
|
우리는 살다 보면 무언가를 원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게 무엇인지는 개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갈망하는 그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욕망은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일까? 내가 과연 그걸 진짜로 원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사람은 자신이 손에 쥐기 전까지는 그 욕망이 실체가 있는 것이었는지 그저 허상에 불과했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의 주인공 토마스는 포토그래퍼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주 업무는 패션 사진 작가이다. 그는 매 화보마다 열정을 가지고 사진을 찍지만, 어딘가 질려 보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지루함을 느낀다. 가끔은 모델들에게 불친절하며 갑자기 촬영장을 나가기도 하고 자신의 화보에 담기고 싶어 하는 젊은 모델들을 무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그가 생기 있어 보이는 순간은 바로 일상을 담은 사진을 찍는 순간이다. 철저한 계산과 세팅된 모델과 찍는 패션화보와는 다르다. 적나라하고 정돈 되어있지 않으며 어떤 사진은 역동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움은 정형화된 화보와는 다른 미를 느끼게 해준다. 그도 도시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남에게 보여주며 아주 흥미로워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묘사된 그의 욕망은 무엇일까. 그는 집착 수준으로 사진에 집요한 태도를 보인다. 사진을 찍고 보고 관찰하며 자신이 찍고자 하는 것에 강한 열망을 표출한다.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에서 누군가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발견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이 찍힌 ‘사진’일 뿐이었다. 그는 뒤늦게 발견한 시체를 보고 신고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시체를 찍어야 한다는 고집을 부린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난 뒤 다시 그 시체를 찾아가지만 이미 그 시신은 어딘가로 사라진 뒤였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계속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던져준다. 강한 열망에 사로잡히지만 결국은 사라진 시체, 마임을 하며 보이지 않는 공을 던지는 사람들, 그리고 그 공을 잡아 다시 던지는 주인공. 이 모든 것을 보다 보면 난해한 영화라는 생각까지 든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찍힌 사진에만 집중하며 달려온 주인공이지만 마지막에 주인공은 보이지 않는 공을 마주하고 그 공이 마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곤 뭔가 허무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끝난 영화는, 그 시체가 누구였고 누가 죽인 것이며 어떤 서사를 가지고 있는지, 그 무엇도 알려주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심지어는 관객인 나마저도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했던 시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삶에서 쫓고자 하는 그 욕망이 과연 삶에 있어 정말로 의미 있고 거대한 것일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주인공이 갈망하던 시체를 찍는 일은 결국은 무의미해졌고 마지막에는 보이는 것에만 집중했던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원하던 욕망도 카메라로 찍는 사진처럼 한 컷만 보면 너무나 크게 느껴지지만 결국 거대한 영화로 담아보면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애초에 감독이 관객들에게 완전한 이해를 바라고 만든 영화는 아닐 것이다. 복잡한 욕망의 실체처럼 결국은 이 복잡하고 난해한 서사가 우리의 감정과 가장 맞닿아 있지 않은가 고민해본다.
글쓴이 융털 |
|
|
🎥 둥글천국 평평지옥
여러분께서는 지구가 둥글다고 확신하시나요? 🌎 사실은 NASA가 우리를 속이고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 사진을 유포하고,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저는 이왕 평평할 거 피자 모양이었으면 합니다. 🍕)
신앙이라는 믿음과 컬트적 믿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결국 믿음에 삶을 의탁한 채 살아간다는 것은 비슷해 보이는데 말이죠. 이번 기획에서는 다양한 믿음이 존재하는 곳에서 펼쳐지는 엉뚱하고 섬뜩한 이야기들을 다룹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계신가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한번 들여다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
|
|
이화 시네마떼끄
ewhacinematheque@gmail.com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