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그리너웨이 | 1989 | 124'

    영화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녀의 정부>[요리사]는 충분히 연극적이다. 두 남성이 무대의 커튼을 젖히는 것처럼 시작하며 9일 간의 행적을 매일 달라지는 메뉴로 구분한 <요리사>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인물들의 이동을 보여주었고 각 공간에 색을 노골적으로 부여했다. 그리고 이 연극은 파란색, 하얀색, 빨간색, 그리고 초록색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신체적 반응을 보여준다. 즉 먹기, 마시기, 배변하기, 성교하기, 트림하기, 구토하기, 벌거벗기, 피 흘리기를 통해 관객은 에로티시즘과 폭력에 노출된다. 다분한 연극다움에 관객들은 현실과 유리된 작품으로 영화를 해석/해체하게 될 것이다.

    <요리사>는 도둑인 알버트가 어떤 인물을 전라로 만들어 강제로 인분을 먹이고 소변을 누는 매우 잔인하며 혐오스러운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렇게 타인을 비체(abject)로 전락하게 만드는 장면은 첫 장면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알버트가 식당에서, 거리에서, 차 안에서 부리는 난동을 다른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수치를 감내해야 했다. 이때 이 도둑의 난동은 대개 조명과 벽, 의상과 식기, 식탁보까지 붉게 물든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이 공간은 도둑의 아내와 그녀의 정부가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알버트의 아내 조지나가 그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던 차에 그녀는 레스토랑 한쪽에서 조용히 책을 보며 식사하는 마이클에게 관심을 가진다. 이 둘은 누구나 머무르는 ‘평등한’ 하얀색의 화장실에서 정사를 나누지만 이곳까지 넘어오는 폭력과 부조리함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들이 도피한 공간이자 수용된 공간은 요리사가 주관하는 녹색의 주방이다. 주방은 요리사인 리처드가 통치·보호한다. 하루 종일 성가 소리가 가느다랗게 울려 퍼지는 공간에서 그의 직원들은 이리저리 섞인다. 화장실에서마저 쫓겨 나온 마이클과 조지나는 이들과 음식들 사이에서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탐욕적으로 음식을 소비하는-정확히는 색과 외설스러운 이미지에만 집중하는 알버트와 대비되는 연인은 기꺼이 그들의 비호자가 되어준 주방에서 자유와 평화를 향유한다.

    그러나 이 자유와 평화는 마이클이 『프랑스 혁명』을 입에 물고 서가에서 죽으면서 마침내 깨진다. 그리고 이 죽음의 코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도둑 알버트가 그의 사디스트적인 범죄에 대해 죽음으로 처벌받는 것까지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붉은-천박한, 폭력성이 짙은 공간이 녹색의 인물들에게 점령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무한히 돌아가는 톱니와 시곗바늘, 차갑고 모난 구조, 공간, 건축. 기계도시 <메트로폴리스>의 풍경이다. 하늘처럼 솟은 건물 위 지상에서는 부르주아들이 영예를 누리고, 어두운 지하에서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쉴새없이 기계를 작동시킨다. 기계에 의존하는 것인지, 기계에 지배당하는 것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을 정도다.

    노동자들은 하나되어 어떤 개인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기계 오작동으로 인해 수십 명이 타 죽어도 아무도 애도하지 않는다. 대체 인력은 넘쳐나니까. 지하의 사람들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지하세계의 성녀인 마리아를 찾기 위해 내려온 프레더는 이런 광경을 보고 충격에 빠져 도시의 통치자인 아버지에게 돌아가 ‘당신은 이 거대한 도시의 통치자지만, 이 도시를 세운 이들은 어디에 있나요?’ 라고 묻지만, 프레더슨은 딱히 어떤 감정도 없이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 즉 지하에 있다고 말한다.

    이 도시의 예수이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잇는 심장인 프레더는 노동자의 옷을 입고 가장 낮은 곳을 살피러 지하로 내려간다. 그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지 깨달은 프레더는 마리아와 재회 후 사랑에 빠지게 된다. 마리아는 드디어 지상과 지하를 이을 중재자를 찾았다며 기뻐하지만, 로트왕이라는 발명가에 의해 그 희망은 난항을 겪게 된다.

    <메트로폴리스>에는 기계의 힘으로 번영한 세계에 대한 선망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군중을 자신의 뜻대로 매혹시켜 조종하는 인조인간과 불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상세계를 지탱하는 어두운 지하세계를 보라. 마치 철창과 지하감옥을 연상시키는 그들의 노동환경을 보라. 영화는 결국 도시의 머리인 부르주아와 손인 프롤레타리아의 양 손을 프레더가 맞잡으며 모든 것이 잘될 것처럼 막을 내리지만, 그 어떤 각진 풍경보다도 섬뜩하다는 것은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