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운 | 2000 | 60'

    영화 <팬지와 담쟁이>(2000)는 1990년대 말 부산을 배경으로 왜소증을 가진 수정과 윤정, 두 자매의 이야기를 그린다. 장애 여성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꿈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기대와 제한을 서사의 주요 축으로 삼으며 내용은 전개된다. 
 지난 겨울, 수정은 친구가 소개해 준 승주라는 남자를 만나면서 설렘을 느낀다. 그렇게 시작된 수정과 승주의 관계는 계절의 흐름에 따라 미세하게 변모해 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정은 사회적 편견, 가족의 우려, 장애에 대한 자신의 불안감과 마주한다. 또한 성적 경험에 대한 지식 부족과, 30대 중반의 나이와 장애를 고려한 결혼에 대한 주변인들의 압박은 수정 앞에 놓인 현실적인 장벽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상황과 감정의 교차는 수정이 승주와의 관계에 있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만든다. 사실 영화는 계속해서 수정과 윤정의 일상적 모습을 담아내지만 수정의 진심이 뭔지는 알기 어렵다. 그녀의 여동생 윤정을 비롯해 주변인들은 수정이 정말로 결혼하고 싶은지, 그리고 결혼을 왜 원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점점 주위에서 부추기는 분위기와는 달리, 수정은 자신과 승주의 마음 모두에게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수정은 승주의 진심을 불안해한다. 그리고 기저에 잠재해 있던 수정의 불안은 영화의 결말에서 현실화된다. 
    늦여름 한낮의 공원에서 승주는 수정을 향해 주저하며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어머니가 자신이 장남에, 외동이어서 손자를 보길 원한다. 자신과 비슷한 장애가 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는 그들의 관계에서 장애의 정도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승주가 겉으로는 장애가 눈에 띄지 않는 경증 장애인으로 묘사됨으로써 더욱 명확해진다. 승주의 조심스러운 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마음을 할퀸다. 그렇게 여름의 끝자락에서 둘의 관계는 종지부를 찍는다. 
    승주와의 관계가 끝이 난 뒤 부산의 푸른 바다 위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먼 곳을 바라보는 수정과 윤정 자매의 모습으로 영화는 막이 내린다. 특별한 개입 없이 인물 간의 대화나 행동을 롱테이크로 포착하는 이전 씬들과 달리, 마지막 장면은 배, 바다, 드레스 등의 조합에서 연출적인 부분이 엿보이며 다소 비현실적인 인상을 남긴다. 마치 꿈속 한 장면처럼 몽환적이며 동화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이는 육체적 사랑을 포함하는 연애와 결혼이 가능하다고 믿고 기다리는 두 여성 장애인의 바람을 판타지로 받아들이는 사회의 모습을 시각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마지막 장면을 보며 느꼈던 그 낯설지 않은 이질감이 우리의 무의식에 내재한 장애 여성의 사랑과 결혼을 바라보는 시각 아닐까.

    영화 <오발탄>은 1961년 제작된 영화로, 당시 한국 사회의 현실적인 모습을 가감 없이 담은 영화다. 한 가족의 이야기지만 결국 그 시대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나아졌다가 다시금 참지 못할 정도로 아파지는 끈질긴 고통을 주는 철호의 치통처럼 그들에게 불행은 끊임없이 찾아온다. 철호가 치과에 가는 것을 미루고 나아지기만을 마냥 기다렸던 것, 그러다가 이를 한 번에 뽑고 피를 흘리며 택시 뒷자리에 머리를 기대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그 이야기가 결국은 한 가족의 비극적인 서사를 대변한다.

    계속해서 ‘가자, 가자!’만 외치는 어머니, 사랑했던 설희의 죽음을 알게 된 뒤 은행을 털기로 마음먹고 강도질을 하다가 붙잡힌 동생 영호, 애인과 결혼하지 못하게 되자 양공주가 되기를 선택한 동생 명숙, 그리고 매일 새로운 것들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들과 철호는 한집에 산다. 인물들에게는 모두 각자의 사연이 있지만 위태로운 일상에서도 그들은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하지만 각자의 일상에 생기는 균열은 소리 없이 이루어지고, 그 파장이 범위를 넓히며 가정이 위태로워지는 건 한순간이다.
 묵묵히 회사에 다니며 돈을 벌어오는 철호에게 동생 영호는 ‘어디 인생이 자기 주머니 속의 돈 액수만큼만 살고 그만둘 수 있는 요지경이냐’며 자신은 이제 용기를 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호의 무모한 계획은 충동적이었던 그의 다짐만큼이나 당연하다는 듯 실패로 끝나게 된다. ‘가난하더라도 깨끗이 살고자 하는 자’와 ‘용기 내는 자’, 이 두 선택지에서 답은 없다. 삶은 그들이 믿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결국 갈 곳을 잃은 것이다.
    철호는 오랜 시간 골칫거리였던 치통을 해결하기 위해 치과에 가 사랑니를 뽑는다. 양쪽의 이를 모두 뺐을 때의 고통은 견디기 어려우니 한쪽만 빼고 다시 오라는 의사의 말에 그는 이 고통을 차라리 한 번에 제거하고 싶다는 생각에 다른 치과에 찾아가 반대쪽 이까지 빼고 온다. 그런 그는 택시에 앉아 어디로 갈까요, 하는 기사의 물음에 묻어두지 못한 불행이 고여있는 장소들을 하나둘씩 대다가 그의 어머니처럼 ‘가자, 가자’만 외친다. 택시 기사가 그에게 ‘갈 곳도 모르는 오발탄’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영화의 제목을 다시 떠올려본다. 갈 곳을 잃은 그가, 그리고 그와 같이 갈 곳을 잃고 헤맸던 이들이 가야 할 곳은 과연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