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는 장소에 대한 인간의 생각과 지식을 전달하는 강력한 도구이기에, 우리는 지도 위 수많은 기호에서 그 함의를 읽어낼 수 있다. 특정 비율로 축소되고 산과 들, 사막과 바다, 이들을 기초 삼아 그려진 지리적이고 역사-정치적인 경계. 핏줄처럼 이어지는 강줄기와 굽이치는 산맥을 바라보며 우리는 자아와 세계상을 구축한다. 연속된 시공간 위에서 축적된 기억은 소속감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특정 공간에 동기화 된다. 마침내 공간은 장소로 승화한다.
호랑이의 척추인 백두대간에서 뻗어져 나가는 굵고 굵은 곡선들, 우리나라의 팔도강산을 당신은 욀 수 있는가? 당신에게 이 나라는, 이 도시는 어떠한 장소인가? 시공간적 연속성으로부터, 교과서로부터, 미디어로부터 이어진 친밀감과 속성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는가. 개인의 정체성은 부분적으로 장소를 기반한 경험으로부터 형성된다. 동시에 개인은 공간에 장소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네마는, 감독은 특정 공간에 어떤 장소성을 부여하였고 관객인 우리는 이를 어떻게 소화하여 장소감을 형성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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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와 이데올로기
양영희 | 2022 |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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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빛, 좋은 공기
임흥순 | 2020 | 110’
수요일 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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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이 잡아가야 할 것들이 누구인가? 영화 <어이그 저 귓것>(2011)은 네 명의 귓것들을 보여준다. 음악을 하겠다며 상경했다. 목 부러져 돌아온 용필, 가족한테 구박받으며 전답과 용필 앞을 어슬렁거리는 뽕똘과 댄서 킴, 마지막으로 점빵과 다 스러져가는 집에서 몸을 뉘는 점빵 하르방. 기타와 자신의 몸뚱어리만 들고 이들은 제주도의 어느 작은 리를 배회한다. 가끔 점빵에서 외상을 또다시 해 막걸리를 얻어 마시고, 노상방뇨하는 하르방을 고자질하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음악과 춤을 사랑하는 뽕똘과 댄서 킴은 어디선가 노랫가락만 들려오면 그곳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삼춘들과 한데 어우러져 몸을 흔들고 노동요를 목청껏 부른다. 양은 냄비를 꽹과리 삼아, 검은 돌과 검은 흙을 배경으로. 이때 점빵 하르망의 노래 ‘양태젖는 소리’가 귀가하는 뽕돌의 색시와 겹쳐진다. 바닷사람에게 이어도란 풍랑의 증거요, 비애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섬이었다. 이제 영화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네 남자의 포크송 일기 너머 삶의 고민을 여성들에게 투영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이를 업고 다니는 중년 여성을, 점빵이 있는 곳까지 밀고 들어오는 대형 마트를, 카지노를 짓는 건설 현장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제주도를 담는 카메라는 아름다운 모습들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산소를 지키는 울멍줄멍한 검은 담장들을, 구불구불 이어진 돌담을, 황금빛 이삭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음악을 하는 귓것들을.
글쓴이 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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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는 재일 조선인 가정의 삶을 통해 그들이 겪은 역사적 상흔을 드러낸다. 일본어와 한국어가 혼재된 대화를 나누는 모녀의 모습은 시대의 물결이 남긴 흉터와 그 속에서도 소중히 지켜온 삶의 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제주 4·3 사건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의 증언을 통해 여전히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메아리로 다가온다. 2018년, 강정희 씨와 그의 딸 양영희 씨는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찾았다. 어린 나이에 목격한 참혹한 대학살에 대한 사죄를 어머니는 일흔 해가 지나서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학살에 관한 어머니의 기억을 청취하고 그 기억 속에 존재하는 생의 증거들과 잊힌 이름들을 확인한 후에야 딸은 어머니의 선택이 원망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딸의 눈물은 알츠하이머로 인해 기억을 점차 잃어가는 어머니 앞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한다. 공포로부터 도망치듯 30km를 걸어서 떠난 둘레길과 거센 바람 속 고향의 들판에서 열여덟의 용감했던 그녀는, 이제 말을 잃고 꾸벅꾸벅 졸 뿐이다. 제주의 그 푸르름엔 슬픔이 서려 있다. 1948년, 이곳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잔혹하게 목숨을 잃었다. 발 딛는 곳마다 피로 얼룩지지 않은 곳이 없다. 어머니는 살기 위해 떠났고, 차별과 멸시를 견디며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더 이상 남한 정부를 신뢰할 수 없게 된 어머니는 결국 북쪽에 마음의 뿌리를 내렸다. 자식들을 북으로 보내고, 피땀으로 이룬 재산을 그곳으로 보내며 그리움을 전했다. 하지만 그 마음조차 완전한 매듭을 짓지 못했다. 조국은 여전히 분단의 아픔 속에 있으며, 조금도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역사의 비극 속에서 일상의 희망을 전한다. 일본인 사위는 안 된다고 했던 어머니는 어떤 거부감도 없이 일본인 사윗감 카오루를 친절하게 받아들이고 카오루는 그런 어머니를 살뜰히 보살핀다. 엄청난 양의 마늘이 들어간 어머니의 삼계탕에 반한 카오루는 그 비법을 전수받고 직접 요리까지 한다. 그들의 이러한 모습이 곧 가능성을 비친다. 역사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도 강력히 작용하는 인간 사이의 관계가 가진 힘, 그리고 그것이 갈등과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치와 일상이 나뉠 수 없어 생긴 그 비극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희망의 끈을 찾는다.
글쓴이 초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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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름 없는 별들>(1959)은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 학생 독립운동 30주년과 이름 없는 독립투사를 기념하고자 제작되었다. 독립운동가였던 상훈의 아버지를 등장시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던 시기부터, 10년이 지난 광주의 모습까지 영화는 그려낸다. 상훈은 학생이지만 뜻이 맞는 학생들과 함께 민족주의 단체인 성진회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센징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는 이들에 응수하여 쪽발이라 비웃거나, 무궁화가 지고 벚꽃만이 만연한 조선의 현실을 노래한다. 그러나 학생의 신분과 항일이라는 행위에 순경 앞에서는 말을 아끼고, 시기가 올 것이라며 서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의 공간인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교사들이 총, 칼을 더 이상 쥐지는 않지만, 교단에서 이들은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제국주의 사상을 휘둘렀다. 이때, 송 선생은 여전히 한복을 갖춰 입고 일본을 격파한 이순신에 대해 가르치는 등 학생들의 얼을 고취했다. 송 선생에 대한 고발로 인한 연행과 한국 학생들과 일본계 학생 간 야구 경기에서의 편파 심판이 야기한 두 민족 간의 갈등은 나주역에서의 여학생 희롱 사건을 기점으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많은 학생이 구금되었고,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송 선생 또한 구속되어 고문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를 계기로 성진회는 거사를 계획했다. 오빠 최형식이 일제의 앞잡이 형사 노릇을 하기에 순사들에게서 의심을 피하기 쉬운 영애가 연락책을 맡았는데, 영애의 뒤를 밟던 최형식 때문에 일부 동지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성진회는 여러 학교와의 연락을 통해 한날한시에 거사를 치르기로 하였다. 최형식이 상훈과 그 주동자들을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따라나선 영애의 희생으로 상훈이 그를 처단하였다. 마침내 단기檀紀 4292년 11월 3일, 상훈은 아버지의 유산인 태극기를 들고, 학생들은 민족의 얼을 들고 한자리에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글쓴이 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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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35도 동경 126도, 남위 34도 서경 58도. 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2021)는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두 공간을 다룬다. 영화가 배치된 공간을 해체하여 변화시키고, 그 전의 기록으로 복원하는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은 마침내 공간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날 것의 공간을 마주한다. 영화는 거울처럼 비치된 공간들을 조명한다. 80년의 흔적을 간직한 구 전남도청, 클럽 아틀레티코, 광주병원, 그리고 유해 발굴 현장들. 탄흔과 탁구공의 티키타카 소리는 일상 속 풍경이 되어버리고, 이 미시적 공간들은 연속된 시공간 속에서 간단하게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일상의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렇게 거리에 산재하는 공간들은 단순히 잊히는 표지판이 아니라, 보존된 기억이 기록되는 공간이 되어야만 한다. 과거를 확인하는 것과 확신을 얻는 것은 1980년대에 연관된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할 방법이기에. 영화는 단순히 도시를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실종자 가족들의 헌신 또한 조명한다. 이런 상실과 실종의 공간을 만들어 낸 군사독재 세력은 자신들의 총과 칼이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의 의지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국가는 우민들로 가득하기에 몇몇 남성들만 제거하면 시민들의 저항은 사라질 것으로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모든 항쟁에는 여성들이 있었다. 여성들이 거리에 나와 어머니회를 조직하여 군부의 붕괴에 이바지한다. 이런 잔혹한 역사를 이 두 도시는, 병원과 도청과 광장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학생들이 참여하는 추모와 광주에서 벌어지는 ‘공식화’된 추모행사, 오월 광장의 아르헨티나 풍경이 교차한다. 모든 공간과 경험은 VR로, 영상으로, 춤으로 해석되어 우리에게 읽힌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그때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해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윗세대의 이야기를 전하는 학생들이 이해를 넘어 폭력을 경험했음을 보여준다. 폭력과 죽음을 겪은 학생들은 길목에 쓰러진 누군가를 구한다. 두꺼비와 올챙이를 응시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찾을 수 있는가. 산 자는 죽은 자를, 없어진 자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 장소는 우리를, 우리는 장소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추모와 애도의 의미를 재정의하면, 우리는 분명 더 좋은 빛과 더 좋은 공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글쓴이 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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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젖은 도시 찬란한 국밥의 사랑 *
이번 주의 상영은 <대동여지도> 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나고 자란 곳의 장소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 그곳에서는 '데덴찌' 혹은 '엎어라뒤짚어'를 뭐라고 부르나요? (🤭) 한편 지금 밟고 서 계시는 땅은 어디인가요? 개인적으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곳은요? 장소는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으며, 반대로 나는 나의 땅에게 어떤 속성을 부여하고 있을까요? 이번 상영의 작품을 보며 우리의 장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늘 걷던 길도 달리 보이실 거예요. 💡🏙️
*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나의 도시」, 문학동네시인선, 2011, 12~13쪽.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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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시네마떼끄
ewhacinemathequ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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