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patriotic as can be - And ration points won’t worry me!”
미국은 세계대전 당시 여성 또한 ‘애국적인 미국인’으로서 전쟁의 승리에 기여할 수 있음을 선전했다. 한정적인 배급량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음식을 식량의 부패를 막는 통조림으로 만들어 저장할 것을 장려함이 그것이다. 남성이 전선에서 활동한다면, 여성은 집안의 부수적인 일을 책임짐으로써 국민의 의무를 다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해당 포스터에서 여성은 강인한 두 팔로 한껏 통조림을 모아 쥐고 있다. 이렇듯 우리가 익히 아는 여러 전쟁 영화에서 여성은 참전 군인의 사랑스럽고 충직한 아내 혹은 수동적인 피해자로 평면적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이미 기원전 4세기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그리스 군대에서 여자들은 군인으로 싸웠다. 20세기 초 영국에서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왕립 공군이 여성들을 받기 시작했으며 러시아, 독일, 프랑스에서도 많은 여성이 군병원과 위생열차에서 복무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인류 전쟁사에서 여성은 무너진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꺼져 가는 희망의 불씨를 들쑤시는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때론 이기적인 개인이었다. 라이언 일병 대신 본국의 포로를 구하기 위해 투입된 ‘피메일 에이전트’들의 연대와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태양의 소녀들’의 고뇌에는 WOrrior(woman+warrior)로서의 긍지가 깃들어 있다. 나치 수색을 피해 몇 년간 은신한 피아니스트 스필만 이전에 죽어서도 영원한 삶을 이어나간 안네 프랑크가 있었다.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열쇠’로 문을 딴 벽장과 무심히 빛나는 ‘황금빛’ 그림에는 미처 끝내지 못한 또 하나의 우리의 전쟁이 있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참전’해 시대를 살아낸 이들이 다시 한번 외친다.
“OF COURSE I CAN!”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문학동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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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의 열쇠
Sarah's Key
목요일 2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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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
Phoenix
크리스티안 펫졸트 | 2014 |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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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장
Shusenjo: The Main Battleground of Comfort Women Issue
금요일 2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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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인 골드
Woman in Gold
사이먼 커티스 | 2015 | 109’
금요일 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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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7월 16일, 파리 마레 지구 생통쥬 가 36번지 3층. 영화는 그곳에서 사라가 동생과 함께 노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러던 중 갑자기 프랑스 경찰이 집을 방문하고 일가족 모두 어딘가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불길함을 직감한 사라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경찰을 눈을 피해서 남동생을 벽장에 숨긴다. 그렇게 동생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만이 수용소로 끌려가며 장면은 전환된다. 그로부터 약 70년이 지난 2009년의 모습. 미국인 기자 줄리아는 1942년 그날의 기억을 쫒는다. 사라가 살았던 그곳이 자신의 시댁이 오래전부터 소유해왔던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줄리아는 의심한다. 혹시 자신의 시조부모가 사라의 집을 부당하게 착복한 것은 아닌지. 또 사라는 그 집으로 다시 돌아온 적이 있지는 않은지. 사라의 동생, 그리고 사라는 지금 생존해있는 것인지.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찾고 싶은 줄리아는 두려움보다 더 큰 진실과 마주하는 것을 택하고, 사라의 생애를 추적해나간다.
영화에서 줄리아가 파헤치는 사라의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벨디브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벨디브 사건은 프랑스 정부가 파리의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내며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사건이다. 단순히 히틀러가 통치하던 나치 독일 점령 당국의 강압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비시 정부의 경찰총수가 자발적으로 협력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과연 프랑스의 수치스러운 역사다. 또한,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침묵과 방관이라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프랑스 경찰들의 대규모 유대인 검거에 일조하기도 했다. 이는 영화 속에서 사라의 이웃이 경찰에게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는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 역사의 이러한 어두운 단면은 50년동안이나 공식적인 역사에서 배제된 채 존재해야 했다. 잡힌 유대인들이 화장실도 물도 없는 경륜장에 며칠씩 갇혀 있었다는 사실도, 그들이 프랑스의 묵인 하에 집단수용소에 수용되고 살해되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종전 이후에 공식적인 역사를 만들고 지키려는 자들은 이 불편한 기억들을 지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속에서 제3자에 가까운 ‘줄리아‘가 진실과 대면하고자 하고, 그 진실의 역사에 가까운 인물들은 이를 저지하고 침묵할려고 하는 모습처럼.
영화는 법률적 의미의 ‘죄’가 아니라 양심에 기초한 ‘죄책감’에 더욱 무게를 싣는다. 이는 피 묻은 과거와 마주하기 위해서 방관, 즉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데서의 도덕적 당당함이 아니라, 묵인하여 ‘연루된 주체’로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절실하다고 말하는 듯 하다.* 정말 그렇듯, 역사는 우리 모두의 산물이며, 그렇기에 우린 과거와 연루된 주체라는 점은 피할 수 없다. 과거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이 아닌, 과거를 ‘기억할’ 책임이 우리에겐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면, ’기억‘은 전후 세대가 과거에 개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일테니 말이다. 영화가 과거의 비극을 현재와 연결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지현, 기억 전쟁, 휴머니스트, 2019, p.88
글쓴이 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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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펫졸트 | 2014 | 98’
목요일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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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기적처럼 생존한 넬리는 새로운 얼굴과 함께 전후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전혀 다른 외양으로 영위하는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가 느끼는 나의 본질은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타인은 넬리가 넬리인지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복원 수술을 마친 얼굴은 마치 새것 같고, 나 또한 이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누군가가 된다. 새로운 타인이 되어 전쟁 이전의 나를 흉내내고, 모방하고, 연기한다.
아우슈비츠에서의 끔찍한 학살을 견뎌내고 살아 돌아온 조니의 아내 넬리는 빨간 원피스에 구두를 신고 사랑하는 남편과 친구들에게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와 안겨야 한다. 그것이 조니가 생각하는 전쟁이다. 찰나의 악몽과도 같은. 깨어나면 다시 보통의,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이는 넬리에게는 남편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고통, 남편이 자신으로부터 유산을 받아낼 생각뿐이라는 진실에 더불어 또 한 번의 재앙이요, 죽음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옷과 화장을 익히고, 필체를 연습하며, 말투와 걸음걸이를 모방하는 넬리는 점차 자신을 떠나보낸다. 조니의 마음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놓지 못하며 조니에게 협력했던 넬리는 점차 ‘넬리’를 벗어낸다. 전쟁 이전 자신이 알던 남편 조니를 조금씩 놓았으며, 사랑과 희망에 기대었던 자신의 마음을 비운다. 그 자리는 대신 새로운 것들로 채운다. 절대 잊지 못할, 잊고 싶지 않은 수감번호로, 함께 죽음과 삶을 넘나들었던 친구들에 대한 기억으로, 그리고 전쟁 이전의 넬리로. 그렇게 채운 모든 것들은 불 같이 빨간 원피스를 입고 피아노 반주에 맞춰 흥얼거리는 노래와 함께 불타 없어진다. 그 재 속에서 넬리는 다시 살아나고, 한 마리의 자유로운 새처럼 유유히 떠나간다.
글쓴이 연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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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장
Shusenjo: The Main Battleground of Comfort Women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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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대한민국에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말이다. 그러나 역사를 잊지 않는다는 것의 반댓말이 ‘잘 안다’가 되지는 않는다. 교과서에서 몇번이고 숱하게 읽어내려갔던 우리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상처를, 당신은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잊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나아가 이제는 잘 알게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할 때가 아닐까.
인종차별 등 현존하는 일본 사회의 문제들을 다루는 영상을 올린 후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된 일본계 미국인 유튜버 미키 데자키는 <주전장>에서 위안부 문제를 파헤친다. 수많은 무고한 여성들이 군인들을 위해 강제로 끌려갔다. 국제법에 여기서 ‘강제’라는 것은, 손발이 묶여 연행되었든 가족의 빚을 위해 자진하여 끌려가든 혹은 중매업자에게 속아넘어가든 그 가운데 여성들의 자유의지는 일절 개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위안소로부터 겨우 도망쳐 나와도, 가부장제가 팽배하던 한국 사회는 순결을 잃었다는 이유로 여성들을 낙인찍고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다. 일본 군 시스템은 이러한 한국의 가부장제도를 이용하여 여성들을 철저히 갈 곳 없는 이로 만들었다.
이에 대해 일본 극우주의자들은 생존자들의 증언이 때떄로 번복된다는 이유로, 구전이 아닌 실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들이 일본군을 따라 때떄로 외출을 하고 사람다운 식사를 즐겼다는 이유로 위안부는 전혀 노예제와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친 몸부림을, 그 작은 숨구멍이라도 존재했다는 것을 책잡아 피해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전히 일본 고위직의 곳곳에는 이러한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고, 이들은 지속적으로 수치스러운 역사는 도려내고 자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교육을 실시하고자 역사를 새롭게 수정한다는 황당무계한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토록 끔찍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법적 책임을 지기는커녕, 제국주의 아래서 그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최소한의 교육과 성찰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상처의 존재를 자각했다면 치료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생했으며,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잊지 않기로 정했다면 이제는 파고들어 알아야 할 떄이다.
글쓴이 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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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커티스 | 2015 | 109’
금요일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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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인 골드>는 클림트의 그림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이 한때 불리던 이명이다. 영화는 동일한 내용의 실화를 배경으로 한다. 마리아 알트만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된 후 조국을 떠난 유대인이다. 무력으로 합병이 이루어진 후 오스트리아에는 새로운 파도가 인다. 유대인의 창문에는 ‘유대인’이라는 글자가 적히고, 억지로 거리 청소를 하며 지나가는 이들의 비웃음을 산다. 거대한 모욕 아래 이들은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다. 당시 명문이었던 가문의 자제였던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가문은 나치에게 직접 감시를 받고 있어 숨소리조차 쉽게 낼 수 없다. 매일 5시 첼로 연주가 울리던 저택에는 이제 초상화도, 첼로도, 무엇하나 남을 수 없다. 금색 물감으로 둘러싸인 마리아의 숙모 아델레의 초상화도 마찬가지다.
결국 마리아는 탈출을 감행한다. 누군가는 도망치는 유대인을 나치에게 신고하지만 동시에 어떤 여인은 도망치는 데 도움을 준다. 여인의 고갯짓 한 번에 도움을 받은 마리아는 가까스로 미국에 망명한다.
그 후로 그녀는 고집스레 독일어를 쓰지 않으며 미국인으로 살아간다. 이름을 빼앗긴 숙모의 초상화를 바라볼 때면 오스트리아에 두고 영영 잃어버린 가족들에 대해 생각한다. 병상에 누워 안녕을 빌어주던 이들을. 삶의 가장 무거운 치욕을 안겨준 고국 땅에 발 붙이지 않고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지났다. 전범국 오스트리아는 이제 미술품 환수에 대한 법안을 개정한다. 마리아에게 숙모를 되찾을 기회가 온 것이다.
마리아는 젊었을 적 가문과 친분이 있었던 연으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 쇤베르크의 손자인 랜디를 변호사로 고용한다. 그러나 초상화를 되찾는 건 쉽지 않은 여정. 마리아는 두 번이나 랜디의 제안을 거절하고 오스트리아에 가지 않겠다 말한다. 희망을 품고 오스트리아에 다녀왔으나 여전히 절차는 그녀를 모욕했다. 행정은 가능한 한 시간을 끌었고 협상은 번번이 거부되었다. 마리아는 랜디를 위해 다시 한 번 오스트리아에 다녀오기로 하고, 결국 미술품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권력이 개인을 얼만큼 말살할 수 있는지를 우리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선택을 누구도 비난할 수 없으리라.
“저 사람들 대부분은 나치에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어. 오히려 동조했던 이들이지.“ 그녀는 그렇게 말한다. 여전히 뻔뻔한 얼굴로 정부 고관들은 협상을 피한다. 패소하자 마자 두꺼운 얼굴을 들고 오스트리아에 초상화를 대여해달라고 말한다. 반성은 어디에나 있는 걸까?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그러나 미국인으로 태어나 쇤베르크란 이름의 의미를 진정 이해하지 못하고 자란 랜디가 여기에 있다. 그는 홀로코스트 추모관 둘레를 걷는다. 오스트리아에서 할아버지가 작곡한 곡의 연주회를 감상하며 눈물을 흘린다. 한편 기자 후베르투스는 별 연고도 없는 두 유대인을 강력히 지지하고 돕는다. 존경해 마지않던 아버지가 나치였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는 지금의 그가 되었으리라. 영화는 부끄럽다. 뻔뻔한 오스트리아 정부 인사들의 태도도, 실리를 취하려고 과오는 슬쩍 묻어두려는 얼굴들도. 그럼에도 랜디는 화장실 벽에 얼굴을 묻고 운다. 수치스러운 얼굴로 아버지에 대해 고백하는 후베르투스, 그의 투박한 표정을 바라보자. 이름을 되찾은 그림은 정당한 소유권을 가진 자가 원한 곳에 팔렸고, 언제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전시되어 있다. 영화 <우먼 인 골드>가 이야기하는 미래는 여기에 있다.
글쓴이 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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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지는 삶
안녕하세요, 나나입니다! 서울은 봄이 오나 했더니 다시 바람이 매섭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올해는 정말 날씨 변덕이 심한 것 같네요. 🥲 날씨처럼 마음도, 주변 상황도 좀처럼 가만 있지를 못하고 기승을 부리는 시기입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종종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고는 했었는데요. 여러분께도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어 넌지시 레터에 적어 봅니다. 🌦️
감기 조심하시고, 다음 주에 새로운 기획으로 다시 만나요! 🤗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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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시네마떼끄
ewhacinemathequ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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