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초코

    왕치아즈는 연기를 시작한다. 피난 온 홍콩에서 연기를 시작해 연극무대 위의 배우였고, 친일파 이모청을 암살하기 위해 막 부인을 연기하는 치아즈. 그는 연기를 통해 제가 있을 곳을 찾고자 한다. 정체성은 유동한다. 카페에서 치아즈는 백인 점원에게 영어를, 중국인 점원에게는 북경어를 사용하고, 저항군 단원들에게 연락할 때는 광둥어를 사용한다. 언어의 변화는 치아즈에게 곧 정체성의 변화와도 같다. 그는 여러 상황에서 다른 인물을 연기한다. 때로 자기 자신까지도. ‘막 부인’을 제대로 연기하기 위해 순결까지도 공동의 것으로 내주어야 했던 치아즈. 그러나 그런 노력은 이 선생이 상하이로 돌아가며 수포로 돌아가고, 그들은 길을 잃는다. 몇 년 후 상하이에서 저항군이 된 옛 친구에게 다시 막 부인을 연기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치아즈는 기꺼이 응한다. 상하이에서 왕치아즈는 잃어버렸던 목표를 되찾았으며, 다시 시작되는 연극으로 자신이 있을 자리에 안착하고자 한다.

    다시 홍콩. 청년들은 친일파 이모청을 암살하기 위해 총을 사고 사격을 연습했다. 권총을 쏴 목표물을 맞히는 데 성공한 친구들은 들떠서 소리치고 떠든다. 그러나 죽음은 생각만큼 깨끗하지 않다. 칼에 몇 번이나 찔리고 계단에 떠밀려도 저항하던 친일파 고향 선배는 목이 꺾이고서야 숨을 거둔다. 권총의 자취는 없고 청년들은 날것의 죽음을 마주한다. 훗날 상하이에서 다시 만난 왕치아즈와 광위민이 이때를 회상하며 ‘순진했다’고 말할 만큼. 이들의 세계는 어느새 달라져 있다. 재차, 연극의 막이 오른다.

    왕치아즈는 훌륭한 배우고, 이모청도 그렇다. 남자는 여자의 연기를 응시한다. 가끔은 여자가 꾸며내지 못하는 모습에 파고든다. 이제 그녀는 헷갈리기 시작한다. 배우인 자신과 인물일 터인 막 부인을. 막 부인은 이모청을 사랑한다. 왕치아즈는? 왕치아즈와 막 부인은 다른 사람일까? 이모청은 누구를 사랑하는가. 혹은 사랑하는가? 어느 하나 확신할 수 없다.

    ‘색’은 ‘계’를 넘나든다. 둘이 처음 관계한 날. 치아즈는 낯선 장소에 불려가고 장소를 탐색하지만 이는 모르는 새 방 안에 들어와 앉아있다. 곧이어 이는 강압적으로 치아즈의 옷을 벗기고 둘은 관계한다. 두 번째, 둘의 관계 와중에 이모청은 입을 맞추려는 치아즈의 얼굴을 밀어낸다. 몇 번이고 입을 맞추려 하지만 이는 치아즈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러나 세 번째 관계 장면에서 이모청은 치아즈의 입맞춤을 피하지 않는다. 치아즈의 시선은 이를 떠나기도 하며, 이모청은 이를 의아하게 여겨 시선의 끝을 따라간다. 곧이어 치아즈는 베개로 이의 눈을 가리지만 그는 거부하지 않는다. 시선은 곧 지배다. 이모청은 치아즈를 경계하며 때문에 시선의 우위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모청은 치아즈가 시선 안에 없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녀가 자신을 응시하도록 둔다. 이렇듯 영화를 상징하는 ‘색’은, 이들만의 ‘계’가 흐려지는 지점이며 이런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그리고 이의 세계는 균열한다.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를 맞춘 날 막 부인은 치아즈의 입으로 말을 한다. ‘가’라는 말 한마디. 이제 어떤 일이 있어도 시간은 앞으로 흐를 것이고, 도로가 통제되어도 치아즈가 탄 인력거는 길을 돌아가지 못한다. 침대 모서리에 앉아 치아즈를 떠올리는 이는 이제 철저히 이분되지 못한다. 비로소. 치아즈에게 방을 내주면서도 서재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할 때, 이를 기다리는 치아즈가 사무실 대신 자동차에서 두 시간을 보냈을 때. 그는 치아즈를 자신의 모습에서 분리하고 있다. 그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장아이링의 원작 소설이 ‘이’가 철저하게 이기적인 일상으로 귀환하는 모습*으로 끝난다면, 영화는 치아즈의 침대를 바라보는 이모청의 모습으로 끝맺는다. 충혈된 눈으로 아내에게 막 부인의 행방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는 공과 사가 나누어진 일상으로 귀환할 수 있는가? 그는 앞으로 얼마나 잘 연기해낼 수 있을 것인가? 열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그는 누구를 생각하는가? 아마도 이는 오래도록 빈 침대를 생각할 것이다. 언젠가 ‘철저하게 이기적인 일상으로 귀환’한다고 해도 그 종소리를 들은 밤을 기점으로 그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몇 번이고 떠올릴 것이다. 결국 제게 돌아온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를, 손님이 떠나가 공허한 침대의 끄트머리를.

*박명진, 심우일. (2008). 〈색│계〉에 나타난 젠더와 내셔널리즘 연구. 어문론집, 39(), 176 page

    총성이 울리고 포탄이 떨어지며 피가 낭자한 평원은 전쟁터를 떠올릴 때 주로 그려지는 이미지다. 또한 그곳에서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는 이로는 자연스럽게 군복을 입은 건장한 남성을 그린다. 여성이 속한 전쟁터는 언제나 그보다는 안전하고 조용하며 보다 은밀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의 향신료 공장 벽장 뒤 은신처는 열세 살 소녀가 혐오와 공포에 맞서 싸우는 가장 통렬하면서도 비극적인 전쟁터였음이 분명하다.

    영화는 몸통에 총알이 박힌 채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장정도, 끔찍한 고문에 시달리는 전쟁 포로도 담지 않는다. 그보다는 몇 평 남짓의 세트장 안에서 긴 시간을 끌어가며 고양이와 코트와 감자를 비추고, 안네와 피터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인 하늘과 나무와 청명한 날씨를 낭만적으로 조명한다. 그리하여 관객은 살갗에 닿는 쇠붙이의 서늘함에는 무던해지면서도 가슴을 짓누르는 폐쇄에 170분 동안 함께 하게 된다. 차라리 나치에게 잡히면 적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있다는 마고의 말은 안네가 깨어 있는 일분일초 마주해야 했던 극도의 불안을 표명한다. 발각되는 순간까지 희망을 논했던 안네의 모습에는 분명 영화 속 프랑크 가족을 비롯한 수십 만의 유대인 희생자에게 바치는 조의와 전쟁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는 영화의 의도가 담겼겠지만 우리는 또한 그곳에서 희망의 무서움과 덧없음을 얼핏 본다.

    ‘내 꿈은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것.’이었던 안네의 꿈은 사후 그녀의 일기가 책으로 출판되고 불멸의 고전으로 남으면서 마침내 이루어졌다. 전쟁마저도 안네의 꿈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꿈이 다른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대대손손 남아 전해지는 것은 분명 슬프지만 필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