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견지입니다. 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지난 겨울은 잘 보내셨는지요? 겨울이 지나치게 춥지 않았으면 했던 바람이 무색하게, 3월 중순이 다가오는 지금까지도 제법 바람이 쌀쌀합니다. 
    3월은 시작의 달이지요. 이 시기가 되면 저는 새로움에서 오는 기쁨과 불안이 빙글빙글 돌아 어지러워지고는 합니다.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해마다 달라지는 것들, 특히 빳빳한 달력, (예년보다 오른) 올해의 기온, 그리고 새로운 보금자리에 익숙해질 때면 또 아는 듯한 평온이 찾아오겠지요. 공교롭게도 저는 최근 몇년 간의 3월을 늘 새로운 침대에 누워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주, 외로운 도시에서 내 집이 어디일지 떠올려보지만, 그런 상상은 쉽게 구체성을 획득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삶의 아주 작고 구체적인 부분, 책장의 배치나, 찻잔의 모양, 책상의 넓이를 쉽게 그려낼 수 있는데도 말이죠. 이런 제 고민이 혼자만의 것은 아니겠지요. 불안으로 속이 울렁거리는  계절에, 사라져가는 집들을 다룬 기획,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로 만나뵙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유동하는 장소들과 그곳을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눈맞추어 보세요. 어디에 머무르느냐는 때로 내가 누구인가와 다르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스크린 너머의 장소들을 여지없이 사랑하게 되실 거예요. 

 

글쓴이 라임

    어떤 이의 꿈은 우주로 간다. 어떤 이의 꿈은 집도 없는 현실에 갇힌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딴 가가린 공동주택은 우주를 꿈꾸는 소년 유리의 집이다. 하지만 그 집은 유리를 지켜주지 못한다. 불도 제대로 켜지지 않고, 엘리베이터도 이상하고, 벽 어딘가에 금이 가 있다는 그 집은 재개발을 위해 철거될 날만 기다릴 뿐이다. 그래서 유리는 오늘도 동네를 들쑤신다. 친구들을 불러 모아 여기저기서 부품을 얻고, 이곳저곳 손을 댄다. 자신이 그 가가린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그러나 현실은 잘 짜인 각본처럼 흐른다. 온갖 예외가 존재하는 우주의 법칙도 현실 앞에선 다 소용이 없나 보다. 방문 점검 날에는 지하에서 연기가 나고, 자연히 가가린 전면 철거를 위해 모든 주민은 6개월 내 철수하라는 권고를 받는다. 뻔한 결말이다. 개인의 노력 따위는 먹히지도 않는 거대한 현실이 너무 뻔해서 실망조차 하기 어렵다.

    유리는 여기에 변화를 만든다. 우직하게도 그 뻔한 현실을 고립시키고 자신만의 세계를 세운다. 이제 그는 가가린 공동주택의 유일한 거주자가 되었다. 석면 가루가 날리면 뭐 어떤가, 그에게는 파란 철문 뒤 나만의 우주가 있는데. 유리는 그곳에서 식물을 키우며 여전히 별을 꿈꾼다. 우주선 내부를 본뜬 새로운 유리의 집은 홀로 유유히 흘러간다.

    그럼에도 결국 현실의 중력 앞에 힘을 잃어버린 유리의 우주는 천천히 무너진다. 수많은 감정을 나눴던 디아나도 떠나고, 하루가 다르게 건강도 사라진다. 눈에 보이는 게 현실인지 환각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여기가 지난한 현실인지 그토록 꿈꾸던 우주인지도 이제는 모르겠다. SOS, 마지막으로 번뜩이는 세 글자를 남긴 유리는 모든 구분을 등진 채 홀가분한 표정으로 둥실 떠오른다.

    영화는 내내 빙글빙글 돈다. 현실의 유리도 꿈속의 유리도 기하학적인 풍경도 모두 화면에 가두고 돌려버린다. 이렇게 주인공을 비관적인 관점 대신 느릿한 회전 속에 가둬버린 연출과 중간중간 삽입된 실제 우주인들의 시퀀스는 영화에 공상적인 감각을 부여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다.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 무중력의 우주로 떠난 유리를, 여전히 그와 함께일 가가린을.

 

    폴란드의 한 수녀원에서 이제 막 서원식을 앞둔 이다. 그녀는 서원을 하기 전, 살아있는 유일한 혈육인 이모를 만나보라는 원장 수녀의 권유를 받고 수녀원을 나선다. 그렇게 이모 완다와 처음 마주하게 된 이다는 자신, 그리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그로부터 듣게 된다. 자신은 유대인이며, 부모 또한 유대인으로서 동네 사람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이렇듯 영화는 전후 폴란드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나치로부터 해방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부 폴란드인들은 유대인들이 원래 자기 집과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싫어했고, 결국 이들을 박해하고 학살한 사건을 말이다. 전쟁을 직접 겪은 완다와, 전쟁으로부터 부모를 잃은 이다. 두 사람은 전쟁의 각기 다른 상흔을 안은 채 가족의 유골을 찾아 나선다.

    제법 방탕한 인생을 살고 있는 완다는 차 안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이다에게 건네며 수도자인 너도 욕정에 대해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아니라는 이다의 대답에 완다는 유감을 표하며 이렇게 말한다. “해 보지도 않고 희생을 맹세해봤자 의미가 있을까?” 완다의 그 물음은 이다의 삶을 관통하며 흔들기 시작한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신께 자신을 바치겠다고 다짐했건만, 실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랑과 자유를 내려놓고 수녀의 길을 맹세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이다에게 수녀란 자신이 결정한 운명이 아니었다. 현실로 발을 딛기도 전에 종교에 귀속된 그녀에게 선택이란 없었고, 어쩌면 의미 없는 맹세 속에 수녀가 되어야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다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뇌하는 사이, 완다는 창문 밖으로 자신을 내던지며 죽음을 맞이한다. 이다의 부모의 유골을 찾는 과정에서 그들과 같이 희생된 자기 아들의 유골을 마주한 완다에게 더는 술과 섹스로도 자유가 충족될 수 없던 것이다. 결국 완다에게 있어 완전한 자유를 행할 수 있는 최후의 것은 자신의 목숨뿐이기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

    그렇게 홀로 남겨진 이다는 죽은 이모의 집을 정리하며 고뇌의 순환을 끊는다. 처음으로 드레스를 입어보고, 술과 담배를 경험하는 일종의 일탈을 한다. 또한 그녀에겐 허락되지 않았던 욕망, 남자와의 관계와 사랑을 느껴도 본다. 이다의 이러한 일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성과 속의 경계를 방황하던 이다는 속을 경험한 후에야 마침내 자신에 대한 답을 얻는다. 이다는 수녀복을 다시 갖춰 입고 수녀원으로 돌아간다. 이를 비추어볼 때, 이다의 일탈은 회피가 아닌 직면으로 와닿는다. 자신을 지나쳐 질주하는 차들의 방향과는 반대로 묵묵히 걸어가는 이다의 발걸음에서 의연함이 묻어난다.

벌써 3월의 반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기온이 많이 올랐지만 밤은 아직 쌀쌀하니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 

3월과 시작이라는 키워드가 나온 김에 시네마떼끄의 새학기 근황을 이야기해 보자면, 저희는 요즘 신입 부원들을 선발하는 데에 여념이 없답니다. 곧 <휴대-영화>에서도 낯익은 이름들 사이 새로운 닉네임을 발견하게 되시겠지요. 🤭 3월을 맞아 여러분은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로 하셨나요? 도전과 유지와 적응이 한데 모여 마음이 한창 울렁거릴 때지만, 그 가운데서도 행복의 끈만은 놓지 않으시길 바랄게요. 

<휴대-영화>는 다음 주에 새로운 영화들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