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 1987 | 162’
목요일 2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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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의 로렌스
Lawrence of Arabia
데이비드 린 | 1962 |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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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커딜리
Piccadilly
E.A.뒤퐁 | 1929 | 109’
금요일 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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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 1987 | 162’
목요일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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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지막 황제>(1987)는 중국의 군주제, 공화정 시대, 중일전쟁을 거쳐 문화대혁명의 시작까지 다양한 역사적 변혁기 속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다. 세 살 때 왕위에 오른 푸이의 삶을 따라 순전히 상징적인 통치자로서의 초기 시절부터 점차 궁궐을 떠나 공산당 재교육을 위한 수용소에 투옥되는 과정까지 영화의 구조는 오간다. 그 속에서 카메라는 끊임없이 권력을 갈망하는 푸이의 뒤를 쫓는 동시에 변화하는 중국의 문화적 및 역사적 풍경의 역동성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까지 본다면 그저 수많은 중국의 역사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의 특이점은 서양 감독의 렌즈가 투영된 중국의 역사 영화라는 점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주목하고 보면 좋을 영화 요소들 3가지를 선정해 보았다.
1.존스턴의 존재 영화에서 푸이는 가정교사 존스턴을 소개받는다. 자금성 성벽 안에 있는 푸이의 고립된 세계에서 존스턴은 세상에 대한 정보의 유일한 출처로 작용한다. 또한 그는 이성과 합리성의 목소리이자 자유와 근대성의 옹호자로 비친다. 그 예로 푸이에게 자전거를 선물하는 모습 혹은 황제는 안경을 쓰면 안 된다는 황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존스턴에 의해 안경을 쓰는 푸이의 모습에서 존스턴의 말이 가지는 강력한 힘은 사실상 푸이보다 우위에 있는 그의 지위를 암시한다. 또한 서양의 모든 것이 좋다는 푸이의 진술은 서구 문명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동시에 서양의 우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백인이 이국적이고 먼 땅에 도착하여 구원자로서 규정된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은 서양이 동양을 다루는 전형적인 접근방식이다.
2.여성의 섹슈얼리티 묘사 서양에서 제작되는 동양 영화 속 적나라한 특징 중 하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서구의 상상과 욕망의 빈 캔버스가 된 듯 동양 여성은 그들에게 에로티시즘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유모가 푸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은 다소 에로틱한 분위기로 형성하며 그녀를 남성의 성적 욕망의 복종적 주체로 묘사한다. 이처럼 여성의 역할은 서구인의 시선에 입각한 동양적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을 감질나게 표현하기 위한 시각적 효과의 대상에 한정된다.
3.불편한 서양인의 시선 가장 낯선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이국주의적 생각은 영화 전반에 걸쳐 보인다. 그중에서도 푸이의 대관식은 시각적 화려함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장면일 것이다. 어린 푸이가 노란색의 천을 통해 왕좌의 내부에서 외부로 나아가고 통일된 복장의 일렬로 늘어선 수백 명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향해 절을 한다. 그러나 황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가운데 푸이가 장난치며 노는 장면은 우리에게 불안한 기이함과 찝찝함을 남긴다. 이외에도, 내시가 어린 황제의 배설물 냄새를 맡는 장면이나 죽기 전 서태후에게 건네던 국에 들어있는 거북이 같은 묘사는 서양 의식에 만연한 중국 고정관념에 대한 풍자적 해석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가 영화를 서사를 위한 도구가 아닌 서양인의 시선을 위한 도구로 바라보게끔 한다.
위의 요소들과 함께 우리는 중국 황실에서조차 영어를 쓰는 이질감 속에서 푸이의 삶을 바라본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모든 명령에 복종하는 내시 종들을 거느리는 푸이의 모습은 겉보기에 무한한 특권의 삶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궐 벽 너머에 있는 죽은 친어머니를 애도하기 위해 궐내를 떠날 수 없을 때, 자신이 갇혀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중요성 이외의 다른 가치를 배운 적이 없는 그는 그저 명목상으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시대의 표식에 지나지 않는다.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푸이가 수용소 화장실에 들어가 동맥을 끊어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을 첫 장면으로, 관광지가 된 자금성의 모습을 마지막 장면으로 배치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곳은 자금성이었겠지만, 그곳은 그가 몰락하는 왕조의 마지막 계승자였다는 태생적 비극의 무대일 뿐인가?
글쓴이 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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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의 로렌스
Lawrence of Ara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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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 | 1962 | 227’
목요일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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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는 아랍 민족의, 터키인들의, 무슬림들의 땅을 비춘다. 광활한 모래사막을 건너는 낙타 위 사내들을, 전쟁터로 떠나는 전사들을 배웅하는 부족원들의 노래를, 메사와 뷰트를, 횡단자들을 질식시키는 모래 폭풍을, 그럼에도 살아가는 베두인들을. 영화가 보여주는 사막을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영화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구조를 보인다. 조셉 캠벨은 영웅 신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서사구조를 발견하고 이를 원질신화라 불렀으며 영웅 신화를 ‘출발→입문→귀환’의 도식으로 설명하였다. 이를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영웅은 일상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러나 시련을 극복하여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모험에서 힘과 교훈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즉,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영화에서 보이는 로렌스의 행적을 우리는 이 도식에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로렌스를 영웅으로 추앙해야 하는가? 로렌스가 영국과 그 식민지라는 일상 세계에서 아랍인들의 권역으로 입문할 때, 그는 동행자를 죽인 셰리프족 베두인에게 분노한다. 아랍인들은 미개하다는 등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며 베두인을 비난하는데, 이는 극 중 물이 사막에서 유목하는 베두인들에게 중요함을 간과한 것이다. 이후 로렌스를 만난 파이살 왕자는 타 권역의 관습에 무지한 모습과 아랍을 위한다는 자신에 취한 그의 모습을 꼬집는다. 이러한 지적에 로렌스는 진정으로 아랍 반란을 위한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아카바 기습을 제안한다. 여차저차 사막을 성공적으로 건너는 동시에 그는 낙오된 베두인을 구하고, 오스만 제국에 맞설 다른 아랍 부족을 규합할 목적으로 시작한 아카바 기습에 실제로 다른 부족을 포섭하고, 공정한 재판관 역할을 수행한다. 아랍 민족의 전통 복장에 익숙해지고 아랍인들이 그를 영웅으로 숭배하고 아랍 부족장으로 추대하는 등, 백인인 로렌스가 아랍인에 점차 동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로렌스는 전쟁이 이어지면서 계속 스스로를 모세와 같은 신화적 인물로, 아랍인들의 메시아로 여기는데, 이는 이어지는 자신이 집행한 처형과 구하지 못한 어린 소년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깨진다. 그럼에도, 그는 아랍에 대한 헌신으로 여전히 사막에 남아 아랍 부족과 함께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불린다. 영화는 영국과 프랑스의 계략으로 통합되었던 아랍이 금세 분열되는 모습과 아랍 민족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결국 영국 정부의 뜻대로 된 자신의 행적에 실망하며 일상 세계로 귀환한 로렌스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대체로 오늘날의 중동을 만들어 낸 주인공인 영국과 기타 서양 열강들을 비판하는 모습도 영화에는 등장하지만, 우리는 서양이 중동을 바라보는 시선과 장치들을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호전적인 모습을 미개한 것이라 칭하며 재현된 현지인, 이들에게 구원자로 숭배받는 백인 남성 침략자-영웅. 여전히 백인에게 타자인 아랍 민족에 비해 우월하게 그려지지만, 이 백인 영웅은 기존의 백인과 다르며 심지어 현지인과 동화도 된다. 그리고 역사에서, 영화에서 적나라한 제국주의는 제삼자를(이 영화에선 오스만 제국) 등장시켜 살짝 가린다. 마지막으로 현지인들이 숭배하던 메시아조차 만들어진 존재이고 여러 결점에 책임을 묻는 연출을 통해 또다시 제국주의적 시선을 답습하지 않았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60년이 지난 영화에서도 쉽게 보이는 이런 시선들을 찾아보자. 관객석에서 바라보며 영화가 그린 사막을 다시 한번 더 살펴보자. 그들은 사막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당신은 이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이윤기 번역, 민음사, 2007, p.50.
글쓴이 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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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 말,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는 날 라쇼몽(羅生門, 나생문) 밑에서 나무꾼과 스님, 나그네가 대화를 나눈다. 이야기는 나무꾼이 목격한 시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산적 다조마루와 한 무사, 그리고 그의 부인. 죽음의 진상을 조사하는 관아를 무대로, 사건은 이제 재구성된다. 잡혀 온 다조마루와, 법정에 선 무사의 부인, 그리고 무당에 의해 혼령으로 불려 온 무사는 판관 앞에서 아는 대로 사건을 털어놓는다. 영화는 진실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 속에서 이야기와 인물은 복잡하게 얽혀 단 한 번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사건은 다만 관아에 선 이들의 주장으로 반추될 뿐이다. 그늘과 빛으로 분절된 영상은 무대를 구성한다. 카메라 너머에 상정된 관아의 판관과 무대 뒤의 청자들은 이들이 만드는 연극의 관객이 된다. 영화에서 알 수 없는 점은 모두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발화자에 의해 사건은 다르게 구성된다. 큰 틀에서 흐름은 같지만, 사건의 발생 동기와 각자가 취한 행동은 모두 다르다. 화면은 발화자에 따라 달라지는 등장인물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비춘다. 그리고 이들은 사건의 진상을 밝힘으로써 각자의 행동이 얼마나 정당했는가를 증명한다. 그 때문에 진실은 재구성되며 관객은 결코 이에 도달할 수 없다. 나무꾼은 자신이 목격한 광경을 털어놓는다-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추잡한 싸움을 벌이는 무사와 다조마루, 두 남자를 부추기는 약삭빠른 여인. 나무꾼의 말에 따르면 세 인물은 모두 일정의 거짓말을 하고 있으나 나무꾼의 폭로로 그들이 사수하려던 가치는 여지없이 거짓으로 판명 난다. 그러나 진실은 다시 한번 미궁에 빠진다. 나무꾼이 죽은 무사에게서 단검을 뽑아 간 인물이라는 것은 그의 발언을 신뢰할 것인지를 다시 질문한다. 최후의 발화는 가장 진실에 가까워 보이나 관객은 이마저도 완전히 신뢰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영화는 믿음을 완전히 거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 내내 라쇼몽에 내리던 장대비는 종반에 다다라서야 그친다. 라쇼몽 아래 선 세 인물은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지를 낱낱이 목격했지만, 나무꾼은 울고 있는 아기에게 온정을 베푼다. 인간성을 믿지 못하더라도, 진실이란 인간에게 결코 객관적일 수 없는 것이더라도. 영화 <라쇼몽>은 서구에서 ‘뛰어난 일본 영화’로서 ‘재발견’된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영화에서 서구의 양식과 일본의 내러티브를 적절히 섞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서구에서 ‘일본적’인 영화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일본에서는 반대로 서구적이라고 여겨졌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서구 중심의 영화계에서 아시아의 영화는 타자로 남는다. 이들이 일부나마 주체로 전환될 수 있는 순간은, 아시아가 서구에 의해 ‘재발견’되는 때뿐이다. 동양은 재현된다. 할리우드 영화 속 기묘한 춤을 추는 동양인 소녀가 아니더라도.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동양의 주술이 등장하는 영화의 밖에서도. 아시아는, 아시아의 영화는, 철저히 외부의 시선에 의해 재정의 된다. 새로이 인식된다. 외부이기를 자처하는 그 시선을 벗겨낸 아시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어디에 자리하는가? 우리는 질문할 필요가 있다.
글쓴이 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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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뒤퐁 | 1929 | 109’
금요일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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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 뒤퐁의 연예계 삼부작이라는 명명답게 <피커딜리>(1929)는 무대에 서는 두 여성과 무대 뒤 남성들을 등장시킨다. 피커딜리 클럽을 운영하는 발렌타인, 클럽의 유명 무용수 메이벨, 새로운 무용수 쇼쇼와 그녀를 돕는 짐. 이들이 이리저리 이동할 때, 우리는 대사가 들리지 않고 타이틀 카드로 몇몇 대사만 던지는 영화에, 세부적인 요소에 집중하게 된다. 20세기 유럽의 신사 숙녀 여러분께 어린 중국인 여성은 어떻게 보였을까. 동양인이라는 인종이 지워져도 무방한 플롯임에도 왜 쇼쇼라는 이름의 동양인 여성을 배역 중 하나로 집어넣었을까? 영화는 단순히 ①명성과 남성으로부터의 찬미를 모두 가진 기존의 나이 든 여성 ②어리고 기존의 여성을 위협하는 새로운 여성 ③뺏고 빼앗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때 야심에 찬 젊은이를 굳이 동양인 여성으로 설정해야만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하지만 주로 서양에서 동양은(특히, 동양인 여성과 여성화된 동양은) 이국적이며 성적으로 신비롭고 유혹적인 이미지로 투사된다. 이렇게 대충 동양 요부로 뭉뚱그려진 쇼쇼는 백인인 메이벨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는 유혹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물론, 영화는 동양의 스테레오 타입에 의존하지 않고 무용수 지망생과 연예계에 초점을 더 맞추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 초반에 피커딜리의 빅터와 메이벨은 호사가들에 의해 늘 얘기되었다. 쇼쇼가 처음으로 무대를 펼쳤을 땐 신문에 그를 예찬하는 이야기가 실렸다. 이렇게 새로운 상황만을 뒤좇는 호사가들의 사정은 영화 말미에서도 드러나며 쇼쇼의 비극적인 결말을 강조한다. 그의 죽음을 크게 싣고도 사람들은 경마장에서 5점을 땄다는 이야기만을 크고 과장되게 이야기하며 화면을 지나간다. 이는 이야기들이 한없이 가볍게 지나가며 연예계는 늘 욕망에 빠진 젊은이들이 등장함을 비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보편적인 이야기는 관객들이 쇼쇼를 쉽게 타자화하지 않도록 해주었을 것이다. 할리우드에서와 달리 애나 메이 웡이 영화 밖에서 백인 배우들에게 동양의 문화를 가르치는 역할을 맡지 않았고 단순히 푸 만추의 딸, 용녀(龍女), 또는 순진하고 효를 다하는 유약한 여성으로만 그려지지 않은 것도 좋다. 하지만 여전히 화면에서 백인과 동양인의 섹슈얼적 관계는 지워졌고 중국의 의상은 어느 문화를 참고한 것인지 아리송하고, 결국 모든 책임은 동양인 남성이 지는 것이 아쉽다.
글쓴이 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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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2학기
안녕하세요. 나나입니다! 어느덧 이번 학기의 마지막 뉴스레터를 보내드리네요. 영화를 보고, 세미나를 하고, 레터에 실을 페이퍼를 쓰며 정신없이 살다 보니 2학기가 훌쩍 지나갔네요. 이번 학기에도 시네마떼끄를 찾아주시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 주시는 여러분은 늘 저희의 단단한 동력원이었답니다. 💪
다들 종강 이후 계획 있으신가요? 저는 늘 여유가 생긴다면 보지 못한 영화를 잔뜩 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요. 과연 계획대로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 다들 저마다의 플랜이 있으시겠지요?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으신 분들도,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으신 분들도, 남은 올해를 단단하게 해쳐나가셨으면 합니다. 시네마떼끄는 봄과 함께 다시 찾아올게요. 존경과 감사를 담아 보내드립니다. 모두들 건강하세요! 🍀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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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시네마떼끄
ewhacinemathequ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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