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마리는 오늘을 산다. 반대로 말하자면 과거를 의식하지 않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닥친 일을 이뤄낼 뿐이다. 어린 시절 그대로 박제당한 꿈이 있는 자신의 언니를 생각하면서. 꿈은 어린아이들의 전유물이니 브릿마리는 가질 수 없다. 그러니 브릿마리는 습관적으로 같은 시간에 베이킹 소다를 든다. 더러운 집안의 흔적, 외도의 냄새. 그리고 한때 가졌던 에펠탑을 지우면서. 그러나 쓰러진 남편의 곁에 외도한 여자가 있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브릿마리는 이십 년 동안의 현재를 뒤로 한 채로 새로운 곳으로 향한다.
   청소년 지도사 겸 축구 감독이라는 명칭을 달고 간 보르그는 엉망진창이다. 임시로 받은 숙소에는 쥐가 나오고, 엉망진창 낙서가 가득한 건물,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축구에만 몰두하는 아이들, 이미 구성된 강력한 마을 카르텔. 강박과 결벽으로 가득찬 브릿마리에게는 최악의 환경이다. 그러나 브릿마리는 축구 골대 하나 제대로 없는 환경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언니를 보고, 꿈과 자신감을 본다. 브릿마리는 동시에 변화한다. 축구보다는 베이킹 소다가 좋다던 주부의 모습 대신 노트에 축구 포지션을 써 가며 아이들을 훈련시킨다. 깨끗하고 안락한, 강박이 스며들어 있던 집 대신 남과 같은 공간을 공유해야 하는 셋방을 구해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별이 더 이상 쌓아놓은 것들을 떠나는 순간이 아닌 새 곳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 된다.
   브릿마리는 삶에서 처음으로 해 본 ‘충동적인 결정’ 덕에 언니의 죽음 이후 먼지 쌓인 꿈을 청소하고 베이킹 소다로 씻어낸다. 아직 빛이 바라지 않은 꿈의 조각은 브릿마리를 파리로, 새 삶으로 이끈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스웨덴 영화 특유의 영상미로 브릿마리의 생을 카메라로 좇는다. 꿈을 스스로 외면하고 한 남자의 안사람, 한 가정의 아내로 살던 브릿마리가 자신의 오래 전 꿈이었던 파리에 가 있는 장면으로 끝내는 이 영화는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의 녹슨 꿈을 다시 들어다 보게끔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브릿마리가 20년 동안 살아온 삶 역시 그녀의 삶이다. 그녀의 20년이 또 하나의 양분이 아닌 단순히 실패의 과정으로 묘사된 것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글쓴이 푸들

   가난해서, 동생 돌보라고, 남자가 먼저라서, 그 밖의 수만 가지 이유로 학교에 보내지지 못한 여자들이 있다. 이들의 삶에는 순간순간 억울함과 아쉬움이 묻는다. 그런 삶의 끄트머리에 한글이 더해졌다. 그래서 이들은 더 이상 누군가의 딸도 누나도 아니다. 이들의 새로운 이름은, ‘시인’이다.  
   김막동, 김점순, 박점례, 안기임, 윤금순, 양양금, 최영자. 영화는 잔잔하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일곱 시인 할매들의 일상과 시를 담는다. 시골 풍경에 더해지는 할매들의 모습은 어쩌면 가장 뻔한 상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서관 관장 김선자는 이들의 평화로운 일상에 파도를 불러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 할매들을 한곳에 모으고, 한글을 가르치며, 익숙한 날들과 지나온 세월을 새롭게 바라보고 시로 옮겨 보라며 귀찮게 한다. 누구도 김선자 관장에게 이런 일을 요구한 적은 없다. 그냥 제가 가르쳐 드리면 어떨까 싶어서요, 작은 마음 하나가 할매들의 일상을 바꾼다. 켜켜이 쌓인 서러움을 한 꺼풀씩 벗겨낸다.
   할매들의 시에는 수많은 기억이 담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대로 울지도 못했던 기억,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친구들과 놀던 기억, 동생들 키우느라 배움이 짧아 기가 죽었던 기억, 남편이 군대에 있을 때 편지를 보내지 못했던 기억, 아이가 숙제를 도와달라고 했을 때 답답했던 기억. 시에 담긴 개인의 기억은 이렇게 역사가 된다. 할매들의 시에는 수많은 마음도 담겼다. 자식들이 건강하게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 손자들을 사랑하는 마음, 나처럼 고생하며 살지는 말았으면 하는 마음, 먼저 떠난 님에게 전하고픈 마음, 조금 더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마음. 어떤 마음들은 글에 담겨 고요하게 전해진다. 그렇게 시는 눈물을 부르고 사람을 모은다. 
   한글 공부에서 시로, 첫 시집 출간에서 작가와의 만남으로, 또 두 번째 시집 출간으로, 할매들의 일상은 점점 커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하루하루는 여전하다. 전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시집 출간과 그에 따른 각종 행사, 우리 눈엔 성과로 보이는 결과들이 시인 할매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가 보다. 하긴 결과가 뭐 중요한가. 모든 순간이 즐거우면 그만이지. 어쩌면 우리는 젊음을 내세워 배움을 하나의 과정으로, 노인을 미래 없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오만을 범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이 담긴 시인 할매들의 글에는 새로운 배움이 있다.

 

   인간에게 있어 타인과의 관계 맺음이란 불가피한 일이다. 우리는 혼자 있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혼자 남겨지면 외로움을 느낀다. 불편하지만 필요한, 우리 삶에 스며들어있는 타인의 존재. 그리고 그 존재들에 의해 영향받으며 시시각각 변하는 '나'의 모습. 영화 <괴인>은 이 모든 것을 평범한 일상 속 사건들을 통해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주인공 ‘기홍‘은 인테리어 현장에서 일을 하는 중년의 목수다. 어느 날 누군가 자신의 차에 뛰어내려 지붕이 찌그러졌다는 사실을 알고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파생된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기홍과 주변 인물들 간의 사이는 어긋나기도 하고, 그 틈 사이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확실한 건 기홍이 말을 할 때도, 침묵할 때도 관계의 지지대는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 관계는 일시적으로 지탱될 뿐, 고정될 수 없다. 그래서 관계란 건 불안하다. 언제 무너질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상할 수 없으니까. 영화의 전개는 이런 ’관계‘의 모습과 닮아있다. 엇박 타듯 관객의 예상을 미묘하게 빗나가는 일상은 결말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기홍은 무례한 데다 허세도 심하고 말투엔 짜증이 묻어난다. 그는 확실히 호감상의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내 인생에서 저런 사람은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아!”라고 할 만큼 비호감인가?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다. 그는 착하고 배려 있는 선한 모습들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아닌 호감과 비호감의 모습이 공존하는 그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기에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리는 것이 쉽지 않다. ‘인간적‘이라서 정의 내리기 어렵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영화가 던지는 하나의 메시지 아닐까? 어느 하나 정의 내리기 힘든,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이다. 인간이란 원래 모호하고 애매하며 변화하는 존재니까. 

   영화 제목인 ‘괴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은 구분 짓는 느낌이 강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 경계선을 긋고 나와 그들 혹은 우리와 너로 ‘괴인인 자’와 ‘아닌 자’를 구분 짓고 싶어진다. 영화 속에는 평범과 상식의 범주에 벗어나는 특별한 한 명이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괴인이 누구일까 하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뒤쫓다 보면, 괴인은 사람 한 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의 무수한 속성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 모두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할, 오로지 내 머릿속에서만 납득 가능한 이상하고 특이한 괴인적 속성이 있는 법이니까. 세상엔 이상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며 마치 나는 아니란 듯 말하는 이들을 향해 영화는 일침을 날린다. “당신도 나처럼 이상하잖아요.”

   벌써 두 번째 모멘터리 작품으로 여러분을 찾아뵙는군요! 🥳 <괴인>은 저번 주에 저도 막 보고 온 영화인데요. '평소와 같은데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날'의 기분을 차곡차곡 모아 만든 듯한 영화였습니다. 어졔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이어폰이 한 쪽만 안 들린다거나, 정류장까지 와서야 지갑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거나, 아무 일도 없는데 괜히 찝찝한 기분에 날씨 탓을 해 본다거나 하는, 그런 기분 말입니다. 이상하고 묘한 하루는 사각형 모양의 바퀴처럼 삐그덕대며 굴러가다가, 눈을 감는 순간 꿈을 꾼 것처럼 하얗게 점멸합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공감할 수 있어 재미있었던 영화였는데요, 여러분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네요! 👀🍿 매달 좋은 한국 독립 영화들을 소개할 수 있어 기쁜 마음뿐이랍니다~ 🤭

   다음 주는 이번 학기의 마지막 상영이 되겠습니다. 끝까지 기대해 주실 거지요? 월요일에 새로운 이야기로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