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봄(Arab Spring)🌱
: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돼 중동 국가 및 북아프리카로 확산된 반(反)정부 시위의 통칭. 이 아랍의 봄 여파로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에서는 오랜 기간 이어진 장기집권 체제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양탄자를 타고 아그라바 궁전 위를 나는 터번 쓴 무리와 신비롭고 오묘한 원색의 무늬 장식이 아랍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 전부라면, 아랍의 봄이 반드시 도달할 그곳으로의 여정이 쉽지는 않겠다. 1년 전 히잡을 불태우며 거리로 나섰던 이란의 여성들과, 이들에게 지지의 목소리를 보태 목이 매달렸던 무수한 시민들을 기억하는가. 지금도 무자비한 진압을 이어가고 있는 정부와 이에 강경하게 맞서는 사람들의 행동은 머나먼 이국에 발 딛고 서 있는 우리에게도 일말의 죄의식, 혹은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좁게는 2010년 이후 아랍권의 반정부 시위를 통칭하는 말로 쓰이는 ‘아랍의 봄’은 사실 아랍 지역의 오랜 종교·여성인권·난민·역사·정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다음 영화들을 통해 다방면의 탄압과 저항의 지난한 세월을 거쳐 온 아랍의 유구한 역사를 되짚어 보고, 아직 오지 않은 아랍의 봄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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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Persepolis
뱅상 파로노드·마르얀 사트라피 | 2007 | 96’
목요일 2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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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북투
Timbuktu
압데라만 시사코 | 2014 |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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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전투
The Battle Of Algiers
금요일 2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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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차
Papicha
모니아 메두르 | 2019 | 108’
금요일 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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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상 파로노드·마르얀 사트라피 | 2007 | 96’
목요일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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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페르세폴리스>(2007)는 발화자인 감독 마르잔 사트라피의 의식을 직접적으로 전달하여 관객과의 소통을 요구하는 에세이 영화이다. 주인공은 혼란스러운 시절을 지나면서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노력한다. 이때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마르잔이라는 개인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한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시대적 배경은 객관적 재현된 것이 아니고 주관적 경험으로 재연됨으로써 오히려 캐릭터 적 속성을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초반에 그려진 이란의 사회 상황은 어린아이의 관점으로 그려진다. 아이는 가족의 성향을 비판 없이 수용하였고, 자신이 만든 종교에서 신과 소통하며 주변 상황을 해석하였다. 이러한 성장 과정에서 그는 이슬람 사회, 문화와의 갈등을 겪으며 주변인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한다. 갈등은 마르잔이 성장할수록 극명해졌고 사트라피 부부는 그를 유럽으로 보내기로 한다.
하지만 유럽에서 마르잔은 아랍계 여성으로, 또다시 이방인으로 분류되었다. 그는 학교와 기숙사에서 늘 소외감을 느꼈고 새로 사귄 친구들과는 공감대가 거의 없었다. 애초에 서구의 사람들은 슈퍼마켓 진열대 앞에서 남은 식료품을 두고 싸우지 않았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풍부함은 본국에서 벗어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다는 안심, 엄격한 ‘혁명수호대’(이슬람근본주의)로부터의 해방감은 그와 괴리되었고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소외감을 더 느끼게 한다. 또한 유럽인들은 혁명과 전쟁을, 이를 겪은 그가 멋있다고 평가하였고 이러한 상황들의 나열은 이란에 두고 온 가족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온 마르잔이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고향은 그를 ‘서양의 문물을 접한 방종한 여성’으로 정의하였으며 이는 더욱 큰 정체성의 분열을 일으킨다. 그는 이란에서 가족들의 도움과 결혼으로 정착하려 하였으나 가부장적 사회, 여성으로서 불공평한 사회에 더욱 불편함을 느낀다. 유럽도, 이란도 그의 안전지대가 되어주지 못한다.
마르잔은 팔레비 왕조 시절에는 세속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뭉뚱그려 반체제적 성향을 지닌 가족의 일원이었으며 이슬람 혁명 이후에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여성이었고, 빈 유학 시절에는 이란 여성이었고, 이란으로 귀국한 이후에는 서양의 문물에 현혹된 여성이었다. 영화 내내 그는 주류보다는 주변부에, 방랑자의 성격을 지닌 채 위치하였다. 영화 마지막까지 그는 본인을 정의하지 못하였다. 마르잔의 정체성을 미완된 채로 남겨졌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어린 시절을, 빈 유학 시절을, 그리고 이란에서 다시 유럽으로 가는 순간을 안다. 그가 항상 다른 대상과 함께 어울리며 세계를 확장하고 구상할 것임을 안다.
글쓴이 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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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이 달린다. 사냥꾼은 사슴을 죽이지 않는다. 사슴은 그저 지쳐 간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이슬람 초기 3대 칼리프 시대의 번영과 순수성으로 되돌아가자고 하는 이슬람 사회 개혁운동의 이념이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재위한 네 명의 칼리프(: 무함마드가 죽은 뒤 이슬람 사회의 최고 지도자를 가리키는 용어)가 통치하던 7세기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 당시 이슬람 제국은 아라비아 반도를 제패하며 번영을 누렸다. 이 시대의 ‘순수성’은 천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거쳐, 오밀조밀 모여 있는 모래 둔덕과, 찬란하다 못해 눈이 부신 윤슬이 일렁이는 강가와, 모래 바람이 이는 광활한 사막에서, 여성의 양말과 장갑이 되었다. 21세기 이슬람 사회의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지하드’는, 담배와 음악보다 양말과 장갑, 즉 개방보다는 은폐다. 그것이 이슬람 사회 본연의 규율이라고 하기엔 사실 이슬람의 교리는 관용과 이해, 개방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카메라는 따뜻한 시선으로 팀북투 주민들의 삶을 비춘다. 감자를 깎고, 물을 긷고, 소젖을 짜고, 곧 있을 암소 지페스의 출산을 기대하며 담소를 나누는 키단 가족, 강가를 따라 자기 몸집 만한 소 여덟 마리를 몰고 가는 이산, 흙바닥을 끄는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닭을 안고 유유히 거리를 거니는 여성, 음악이 금지된 사회에서도 기타 줄을 튕기며 즐거이 노래하는 집단을 가까이에서, 또 멀리서 비추는 카메라에서 우리는 절로 따스함, 그리고 왠지 모를 엄숙함을 느낀다.
카메라는 심지어, 팀북투 주민들과 근본주의자들의 대립이 격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키단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사티마와 토야를 찾은 압둘카림과 오마르, 모스크에서 의견 충돌을 보이는 주민들과 근본주의자들, 생선을 파는 여성에게 장갑을 끼라고 강요하는 총 든 사나이들, 수풀에 마구잡이로 총을 쏘며 화풀이를 하는 압둘카림, 점점 떠나 가는 이웃과 앞으로의 삶을 이야기하는 키단과 사티마,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지페스, 음악을 연주하다 발각되자 기타를 숨긴 뒤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는 사람을 비출 때조차 카메라는 어떤 변화도, 흔들림도 없다. 아름답기까지 하다. 키단이 우발적으로 어부를 살해한 뒤 비틀거리며 강가에서 한 걸음씩 벗어나는 장면은, 두 사람이 점차 정반대로 향해 가는 모습을 롱 쇼트로 잡아낼 때의 풍광은, 가히 영상미의 극치라 할 만하다.
이렇듯 영화 전반에 걸쳐 팀북투의 황색을 배경으로 따뜻한 색감을 유지하는 와중에도, 그럼에도 우리는 대립이 유발하는 긴장감과 팀북투 주민들의 한을 고스란히 느끼니 이는 촬영 기법에서 비롯됨은 아닐 것이요, 근본주의자들의 억압을 꾹꾹 눌러 삼키는 팀북투 주민들의 절제된 언행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길거리에서 본 당신의 딸이 마음에 드니 내가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며 거부할 시 무력으로 취하는 것도 온당하다 말하는 아부 자파에게서, 나의 사적 재산이 먼저 침해되었음에도 ‘그들의’ 율법을 적용해 가족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사형에 처해지게 된 키단에게서, 손에는 장갑이 꼭 끼워진 채 채찍질을 견디며 노래하는 여인에게서, 우리는 극단으로 치닫는 종교의 불합리성을 본다.
그들이 주장하는 순수한 이슬람 사회란 무엇일까?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교리를 스스로조차 지키지 못하고, 그런 일원의 잘못을 묵과하고, 수치심에 다시 또 피우지 않았노라 우기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손과 발을 가릴 권리는 어떤 경위로 존재하게 된 것일까.
사슴이 달린다. 영화의 시작에서도, 끝에서도 달린다. 토야는 달린다. 영화의 끝에서 소녀는 엄마, 아빠를 있는 힘껏 부르며 달린다.
*조성택·김석주, 「‘이슬람 근본주의’의 변화와 지하디스트 테러리즘에 관한 연구」, 『한국테러학회보』 제12권 제2호, 한국테러학회, 2019, 161쪽.
글쓴이 연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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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전투
The Battle Of Algi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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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권력은 시선에서 나온다. 카메라 렌즈로 무엇을 어떻게 비추고 담느냐에 따라 영화의 색도, 메시지도 달라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권력을 휘두를 생각은 없어 보인다.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알제리에 군림했던 프랑스의 식민통치와 그에 대항하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활동을 담으며 프랑스의 정치적 폭력행위, FLN의 폭력적 투쟁 모두의 정당성에 의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아주 기록적이고 사실적인 시선으로 FLN의 지도자 알리의 흔적을 따른다. 동료의 배반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 마지막 순간부터 시작해 투사로 활동했던 지난 3년간의 저항을 하나씩 담는다. 년도와 날짜는 물론 정확한 시간까지 안내하는 자막과 상황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듯한 카메라의 객관적 움직임, 줌인과 줌아웃 그리고 흐릿한 초점까지 마구잡이로 뒤섞이는 풍경은 극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다큐멘터리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시선 또한 지나치게 다큐멘터리적이어서 영화가 누구의 편을 들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말하자면 이렇다. 영화는 분명 FLN의 일원을 지독하게 고문하여 알리의 위치를 발설하게끔 만든 프랑스 군인들을 비추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공식 석상에서 자신들의 명령에는 고문이 없다며 오직 합법적 수단인 심문만을 활용한다고 뻔뻔하게 이야기하는 프랑스 군대 대령을 비춘다. 실제로는 ‘심문’이라는 단어가 고문의 은어처럼 사용되는 장면, 반군을 ‘몸을 수천 토막 내도 머리만 남아있으면 다시 자라나서 증식하는 촌충’에 빗대며 집행부를 확실히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도 담는다. FLN을 그리는 방식도 비슷하다. 알제리 사람들이 군대에 쫓기는 반군을 흔쾌히 숨겨주는 모습, 다 같이 합심하여 파업에 성공해내는 모습 등을 통해 그들이 응원받아 마땅한 결백한 집단인 것처럼 그리다가도 가방 모양 폭탄을 활용해 테러를 일으켜 평범한 사람들이 즐기던 평화를 부서뜨리는 모습도 담는다. 물론 식민통치의 피해자였다는 점에서 알제리가 프랑스에 비해 절대적인 도덕적 우위를 갖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지속적으로 양측 모두의 행동의 결과로 도망치는 사람들, 부서진 건물, 폐허가 된 도시, 죄 없이 죽어가는 아이들을 비추며 폭력의 정당성에 대한 궁극적이고도 미묘한 의문을 던진다.
이렇듯 <알제리 전투>는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통치 시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처럼 남아 관객이 그 과정에서 발생한 온갖 비인간적인 행위들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그 어떤 폭력과 살생도 완벽히 정당화될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는 결국 전쟁, 전투에 절대적인 승리자는 없으며 모두가 패배자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닿는다. 더불어 마지막 장면으로 알제리 사람들의 대규모 시위 장면을 택한 것은 마치 그 무엇도 인간의 존엄만큼은 꺾을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설령 피비린내 나는 식민통치, 신체적 고통, 죽음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일지라도 말이다.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담담한 시선과 함께 <알제리 전투>는 역사 재현물로서 기능하는 영화의 역할을 증명하는 작품으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글쓴이 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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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아 메두르 | 2019 | 108’
금요일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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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여자가 하나 있다. 이름은 나즈마, 이슬람 원리주의가 판을 치는 알제리에 산다. 그러면서 히잡은 쓰지 않고, 대학을 다니고, 담배를 피우고, 축구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른다. 몰래 클럽 화장실에서 또래 여자들의 주문을 받아 옷을 만들어 팔고, 옷가게에 납품한다. 친구들도 이상하다. 오빠가 정해준 남편과 고분고분 결혼하지 않고, 취향껏 데이트를 하고, 나즈마와 함께 대학을 다니고 담배를 피우고 축구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른다. 마음껏 뛰거나 늦은 밤 기숙사에 몰래 들어오기도 한다.
그러다 나즈마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더욱 이상해진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던 그날 언니가 죽었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다 언니를 찾는 누군가가 있기에 언니를 불렀더니, 그대로 죽였다. 총성 한번으로 끝이었다. 나즈마의 세계를 함께 보듬어주었던 언니가 그렇게 죽었다. 그래서 나즈마는 더 이상해졌다.
히잡의 한 종류로 온몸을 덮는 큰 천인 ‘하이크’를 가지고 새로운 옷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억압의 상징 하이크로 자유를 찾고 저항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곧 나즈마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계획을 알리고, 모델로 섭외하고, 패션쇼를 기획한다. 친구들 몸에 하이크를 둘러보고 주름을 잡아 모양을 만든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 건 아니었다. 학생 식당에서 패션쇼를 하겠다는 계획이 반대에 부딪히기도, 가장 친한 친구, 또 남자친구와 다투며 몇 번씩 무너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 나즈마는 친구들과 함께 패션쇼 당일 무대에 선다. 자신의 손길이 닿은 새로운 하이크를 입은 친구들과 함께.
나즈마의 이야기가 최정점에 닿은 그 순간 갑자기 영화는 어두워진다. 문자 그대로 영화 속 모든 조명이 꺼진다. 이후 스크린에 담기는 장면은 비극적이다. 총을 들고 무장한 채 쳐들어오는 남자들, 아수라장이 된 패션쇼장.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어린 여자들과 끊이지 않는 총성, 이미 죽어버린 친구의 얼굴, 좁은 공간에 숨어 벌벌 떠는 나즈마. 그렇게 나즈마의 패션쇼는 끝이 난다. 그렇다고 영화가 끝까지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나즈마가 친구와 함께 미래를 이야기하는 모습을 비추며 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나즈마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이제 다시 생각해보자. 나즈마를 수식했던 ‘별나다’는 단어에 대해서 말이다. 여자는 히잡을 써야 하고 대학을 다니면 안 되고 담배도 축구도 노래도 춤도 소리지르기도, 결혼도 연애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게 당연한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남자친구로부터 너에게 기회를 주는 거라는 말을 듣는 사회는 별나지 않은지, 수의를 입기 싫으면 히잡을 입으라는 말은 별나지 않은지, 종교의 이름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건 별나지 않은지, 수많은 여성이 쓰러지고 죽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하루하루가 무엇보다 이상한 게 아닌지.
예쁜 여자애 ‘파피차’의 함의는 무엇인가? 그 함의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한계는 어디서 오는가? 영화에 담긴 나즈마의 이야기는 이렇게 묻는다.
글쓴이 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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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아랍의 봄 상영도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10월을 잘 마무리해 보자고 인사드린 것이 그제 같은데 벌써 11월의 반이 지나갔네요. 문득 이러다 눈 감았다 뜨면 졸업할 때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납니다. 😂
내일이 2024 수능이라는 것, 알고 계셨나요? 이제서라도 떠올랐다면 주변의 수험생분들에게 따뜻한 응원 한마디를 건네보도록 합시다. 어쩌면 휴대-영화를 받아보시는 분 중에 수험생이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찬란한 미래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지요. 당장은 어쩔 수 없는 미련과 아쉬움이 가득하겠지만, 긴장하지 마시고 원하는 결과를 당당히 얻어 돌아오시기를 바라겠습니다. 2024 수능 파이팅! 💪🔥
휴대-영화는 월요일에 새로운 기획과 함께 다시 찾아올게요!
* 허수경, "不醉不歸"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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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시네마떼끄
ewhacinemathequ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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