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불안이 공존하는 세계. 화려한 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지만, 더욱 광활하고 잔인해진 부조리를 안겨주었다. 2차 대전의 경종을 울리던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는 일본에 사상적인 단절을 일으켰다. 제국주의로 쌓아올린 금자탑이 한 순간에 무너진 이후 일본은 묵시론적인 세계관이 널리 퍼졌고, 그 영향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둡고 비관적인 장르의 영향이 지속되던 와중, 70년대에 접어들며 일본 미디어엔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세계 박람회의 각종 미래적인 기술과 문명의 소개로 공상 과학(Sciene Fiction, 이하 SF)에 대중적 관심이 급상승한 것이다.  떠오르는 SF 인기에 힘입어 TV에서는 <우주전함 야마토>가 방영됐고, 극장에서는 <스타워즈> 티켓이 불티나게 팔렸다. 1980년대에는 일본에 SF 장르가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전보다 세계관은 더욱 확장되었으며, 고도의 경제 성장을 겪으며 작화는 더욱 화려하고 정교해졌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는 대중적 관심이 영상물로 쏠리면서 영상의 근간이 되던 SF 문학 잡지들이 폐간되기 시작한다. 많은 작가들의 주요한 배출구가 사라지기 시작하며 SF라는 소재에도 조금씩 한계가 생겨났다. 90년대부터는 호황기 버블들이 터지며 경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SF 애니메이션의 인기는 식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명작으로 거론되는 <공각기동대>, <에반게리온> 등이 개봉하였다. 에반게리온을 기점으로 거대 서사 SF는 더이상 관객들에게 신선함을 안겨주지 못하게 되었고, 이후 서사는 조금씩 개인에게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며 SF 열풍은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번 기획에서는 소위 일본의 ‘버블 애니’라고 불리는 일본의 SF 애니 명작들을 꼽아보았다. 버블 애니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작품들로, 일본의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여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화려한 그래픽과 액션 장면을 특징으로 하는 이 영화들은 기술이 고도로 발전된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제는 영화에서 그리던 미래가 현재가 되어버린 시점. 기술에 거는 희망과 자만이 뒤틀려 만들어낸 눈부신 광경들은 어째서인지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여전히 우리는 전쟁과 함께 숨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기술은 과연 인류에게 축복인가, 저주인가. 우리에게 미리 찾아온 미래를 살펴보면 조금은 해답이 보이지 않을까. 패전과 버블경제를 지나보낸 일본이 그려낸 인류의 미래를 살펴보자.

   먼 옛날 한참 뒤의 미래를 떠올린다면 그 미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지구가 무너질 것처럼 황폐화된 땅, 죽어나가는 사람들, 끊이지 않는 총성에도 인간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이는 기술의 발전과 전쟁의 연속 사이에서 더욱이 빛난다.

   전쟁이 일어났다. 화면에서 쨍한 색감들이 이리저리 튄다. 형용할 수 없는 다채로운 색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잠깐 멍하니 화면을 바라본다. 하지만 귀가 마비될 정도로 반복되는 총성에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뜬다. 이건 전쟁 씬이다. 사람이 서로를 죽고 다치게 하는 장면. 그 사이에 놓여 훅 끼치는 이질감을 온몸으로 느껴본다. 

   영화는 ‘인류가 폭발 직전의 인구를 우주로 이민시킨 지 어언 반세기, 인류 제2의 고향에서 자식을 낳고 기르고 생을 마감했다’는 나레이션과 시작된다. 찬란한 우주의 모습과 함께다. 우주 도시 ‘사이드3’은 지온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지구 연방을 공격해온다. 아무로는 의도치 않게 건담 로봇 안에 들어가 조종하는 일을 맡게 된다. 기계를 좋아하던 그는 초반에는 의욕 넘치는 모습을 보이지만, 전쟁이 계속되며 사람들이 죽고 진전되지 않는 상황에 지치게 된다. 

   지온이 전쟁을 ‘인류의 자유를 위한 싸움’이라고 말한 것에서 걷잡을 수 없이 멀리까지 와버려 더 이상은 손쓸 수 없을 것만 같은 비극의 상황이 보여진다. 이들이 말하는 인류의 자유는 무엇일까. 인간의 욕망은 과거, 현재, 미래와는 무관한 것일까, 수단과 방법만 다를 뿐 본질은 모두 같을까.

   멈춤 버튼을 누르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영화에서 그리는 우주는 광활하고 아름답다. 그 한가운데에서 건담이 구름을 가르며 영화는 끝이 난다. 

   누구나 지구에서 사람이 살 수 없게 됐을 때의 새로운 세상에 대해 상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며 낯선 무기들이 등장하고, 욕망에 지배당한 인간의 악랄한 모습, 그렇게 맞이하게 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우리는 으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오래오래 건강하시라는 말을 끝으로 등을 돌리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그 장면에서 전쟁을 온몸으로 직접 겪으며 성장한다는 것은 뭘 뜻하는 것일지, 여러 차례 상상했던 먼 미래의 모습임에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글쓴이 도라

   푸른 비행복을 입고 거침없이 바람을 가르는 나우시카는 오늘도 피리로 곤충들을 서식지로 돌려보낸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사람들은 오염된 공기와 황폐화된 나무 사이에서도 그들 나름의 삶을 꾸려 간다. 치코 열매로 영양을 보충하고, 풍차를 돌리며 불어오는 바람의 보호를 느끼고, 비록 숲의 독 때문에 왕은 더 이상 날지 못하더라도, 공주의 기지와 ‘씩씩함’을 이정표삼아 부해와 함께 살아가는 곳, 바람계곡이다.

   이들의 잔잔한 일상은 토르메키아의 비행선이 바람계곡에 추락하면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진다. 크사나는 토르메키아의 막강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거신병을 부활시켜 썩은 바다와 오염된 환경을 불사른 뒤 그 위에 인류의 새로운 문명을 세우려 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환경을 ‘리셋’하자는 토르메키아와 어떻게든 썩은 자연을 정화시켜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바람계곡의 입장을 적극 조명한다. 얼핏 보면 이분법적인 관점으로 보이지만, 사실 나우시카와 크사나, 아스벨, 바람계곡, 토르메키아, 페지테의 국민들은 공통적으로 불안하지 않은 인간적인 삶을 바란다. 그 과정 상의 자연 파괴 여부가 이들의 대척점인데, 나우시카가 부해가 지구를 정화시키고 있었다는 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감독은 나우시카의 편에 손드는 것을 더더욱 망설이지 않는다. 거신병의 굉음과 무시무시한 외형, 위압적인 토르메키아의 무장한 군인들, 그에 반해 노약자와 어린이의 불안에 찬 목소리와 순박해 보이는 사람들이 2D로 표현된 화면에서 우리는 토르메키아와 바람계곡의 입장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느낀다. 

   인류는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는 나우시카가 부해의 비밀을 깨닫는 순간부터 사실상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꽂힌다. 오무 떼에 몸을 던지는 나우시카와 그런 나우시카를 감싸는 오무들. 마침내 푸른 옷을 입고 황금벌판에 내려서게 된 나우시카는 오늘도, 내일도, 곤충들과 함께,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나아간다. 경제와 환경은 같이 갈 수 없는 걸까. 인류의 영광을 재현하려던 토르메키아의 강대한 군사력이 곤충과 바람을 끝내 누르지 못한 것은, 1980년대 경제의 최대 호황기를 누리던 일본의 화려한 성장 이면의 어떤 문제와 조금의 관련이 있진 않을까. 다소 평면적인 시선과 메시지를 담는 영화가 그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자.

글쓴이 연두

글쓴이 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