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Jesus Christ Super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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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네
Undine
크리스티안 펫졸트 | 2020 | 90’
금요일 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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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지점 이전까지, 영화를 보는 우리는 계속해서 혼란을 겪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주인공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야기 탓에 난데없이 찾아오는 불청객들에게서 영문도 모른 채 답답함을 겪는 마더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한 답답함을 느낀다. 도대체 왜 이들이 이렇게 찾아오는 것인지, 상징성을 가진 것이 분명한 그 집이라는 공간은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껏 함께 잘 지내오던 ‘그’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인지. 하지만 인상을 찌푸리고, 다리를 떨며 스크린에 집중한 새에 우리는 자연스레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들의 대사와 행동 하나하나에 흡수된다. 카펫 아래에서 조금씩 젖어들어가는 나무 바닥처럼, 점점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들처럼, 개인의 공간이 하나둘씩 의도와는 상관없이 붕괴되는 것처럼, 소리 소문 없이 보는 이를 하여금 그 집의 비밀 속으로 가둔다.
‘한 지점’은 시인인 ‘그’가 시를 완성하게 되는 순간이다. 한참을 제대로 시를 쓰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는 오랜 기간에 걸쳐 드디어 시를 썼다며 ‘그녀’에게 시를 보여준다. ‘그녀’는 시를 읽고 감격한다. 이제 드디어 좋은 쪽으로 내용이 전개되나 싶지만 영화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의 팬이라는 많은 이들이 집을 또다시 찾아오고, 집은 아수라장이 된다. 그 집은 이제 더이상 ‘그’와 ‘그녀’가 사는 집의 의미를 잃는다. 집의 형태가 사람들에 의해 점차 무너지고, 그곳은 점점 상징적이고 종교적이고 폭력적인 하나의 공간이 되어 ‘그녀’를 괴롭게 한다. 그러다 그녀의 아들이 탄생하고,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이들은 더 광적으로 무언가를 원한다. 그들은 이는 모두 신성한 의식일 뿐이다.
<마더!>는 제목인 ‘마더’뒤에 찍힌 느낌표 하나처럼 짧고 강렬한 임팩트를 가진다. 매 상황에 의심하게 되고, 클로즈업되는 장면에서는 화면 너머의 눈빛까지도 꿰뚫어보려 하지만 이는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밖에서 이미 누군가에 의해 짜이고 반복되어진 이야기일 뿐이었다.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그녀’가 홀로 대치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그녀’의 시각에서 사건을 읽는다. 그렇기 때문에 집이 붕괴됨과 동시에 그녀 또한 붕괴되고, 이 전개가 모두 예상된 것이었다는 엔딩에서는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집, 그녀, 그, 그리고 사람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하나하나 답을 찾아내려 하지 않아도, 두 눈으로 직접 본 것 만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져오던 굴곡의 역사를 짐작해볼 수 있다. 알고 있는 이야기는 극히 일부지만, ‘그'는 항상 ‘그'였을 것이고, 결말은 항상 완벽히 같았을 것이다. 엔딩 장면에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시작의 순간이지만, 왠지 끝을 본 것만 같다.
글쓴이 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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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Jesus Christ Super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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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신이 있다면 왜 사는 게 이리 슬픈가요, 그렇게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삶의 비극은 계속되는 것이며 종교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그 수많은 악행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단 말인가? 신앙에 어떤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반기를 드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무신론자에 가까운 필자의 입장에서는 다분히 인간적인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절제되고 성스러운 문장들로 쓰인 원본의 성서보다,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숙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더 인상적으로 남은 것도 어쩌면 그러한 인간다움 때문이 아닐까.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예수의 마지막 7일 동안의 삶을 현대의 배경에서 새롭게 해석한 록 오페라다. 약칭 <지크슈>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했을 뿐이었지만, 군중들은 예수를 ‘슈퍼스타’로 만들어 그를 사랑하고 떠받든다. 그러나 그의 말이 곧 법인 것처럼 추종하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돌변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분노하고 증오하는데, 그 가운데서 예수 자신도 스스로의 희생으로부터 하나님이 무엇을 얻으시려는지 모른 채 자신의 뜻을 곡해하고 멋대로 실망하는 군중들에 대한 답답함을 강렬한 록 사운드로 표현한다. 티끌 하나 없는 성자라기보다는 숙명을 짊어진 채 괴로워하는 연약한 ‘인간’에 가까운 모습이다.
<지크슈>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지점이 아닐까 싶다. 성경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작품이지만 그것의 뿌리는 찬양도, 비판도 아니다. 죽을 만큼 외로울 때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아픔, 선망의 대상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로부터 돌아설 때의 상실감, 멋대로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일,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샤우팅과 풍부한 록 사운드. 그런 둥둥 떠다니는 감정들에 공명하고 성서를 새롭게 이해해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극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풍부한 감상을 남기게 한다.
글쓴이 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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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타카라는 소년은 재앙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타타라 마을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서 제가 쏘아 죽인 멧돼지가 타타라 마을의 숲에서 잔인하게 쫓아내진 후 재앙신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슴신의 숲에 사는 ‘산’을 만나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고자 애쓴다. 관객 또한 어느 쪽의 입장이 콕 집어서 잘못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제철 기술의 발전은 마을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경제적, 사회적 삶을 보장해 주었고, 마을은 외부 세력의 습격에도 끄떡없는 요새가 되었다. 이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숲에 매장된 사철들을 캐내야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던 것이다. 반면 숲에서 들개와 함께 살아가는 원령공주 산은 정반대의 입장에 놓여 있다. 숲을 파괴하는 인간들 탓에 살아갈 터전은 점점 줄어들고, 함께 살아온 가족들의 안위는 매일같이 위협받는다. 살아갈 곳과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산이 할 수 있는 것은 맞서 싸우는 것, 그리고 인간을 증오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던 이들도,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깨닫고 공존하는 미래를 그린다. 무작정 한쪽의 입장을 밀어붙여 또다른 누군가의 터전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공생이 곧 지속가능한 삶을 일궈내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인간을 증오하던 산은 아시타카를 좋아하게 되고,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에 남아 자연과 인간의 중립을 지키기로 한다. 산을 보고 ‘들개에게 혼을 뺏긴 불쌍한 계집애’ 라며 깔보던 사람들도 자연과의 선을 지키며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기로 마음먹는다. 파멸만이 결말일 것 같던 영화는 이렇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막을 내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환경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다음 세대가 해결할 과제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무책임하게 미루고만 있다. 그러나 진보로 한발 더 내딛기 전에, 발전이 인류에게 좋은 삶을 보장해준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참인 명제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명과 자연이 접촉하면서 우리는 수많은 질병과 재난의 역사를 겪었고, 모든 파괴와 재해는 연결되어 있어 언젠가 우리를 편안케 하는 것들이 종말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자연을 지배할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 나아가더라도 주위의 숲을 둘러보면서 그렇게 공존하는 것이 곧 지혜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글쓴이 나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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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펫졸트 | 2020 | 90’
금요일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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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케의 동화 속 운디네는 물의 정령으로 인간 남자와 결혼하면 영혼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남편이 그녀를 물가로 데려간다든지 물가에서 그녀를 비방하게 되면 운디네는 다시 물로 돌아가야만 하고, 특히 남자가 재혼을 하게 되면 물의 정령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된다.* 펫졸드 감독의 원소 삼부작 중 물을 소재로 한 영화 <운디네>의 첫 장면은 흔한 연인의 마지막으로 시작한다. 연인 요하네스의 외도가 의심되는 상황에서 운디네는 애절하게 매달리지만 그는 단호하기만 하다. ‘네가 떠나면 난 너를 죽일 수밖에 없어. 알지?’ 연인 간의 싸움에서 감정이 격해져 나오는 다소 과격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영화가 운디네 설화를 모티프로 했다는 영화임을 아는 관객들에겐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말이다. 그렇게 영화의 시작부터 우리는 한 사람의 마지막을 짐작한다.
결국 요하네스는 떠났지만, 운디네는 낡은 인연이 떠난 카페에서 새로운 인연을 대면한다. 물의 정령의 이름을 가진 운디네의 직업은 역사학자이자 도슨트지만, 새로운 연인 크리스토프는 잠수부라는 설정은 관객이 다시금 운디네 설화를 상기하게끔 한다. 마치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진 둘의 하루하루는 소중하다. 함께 수영하고, 도시를 설명하고, 기차에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안팎으로 손을 마주 흔드는 낱낱의 장면은 어렸을 적 책으로만 보던, 혹은 이야기로만 듣던 정령과 인간의 사랑이 시각화된 듯하다. 그러나 스치듯 우연적이었던 요하네스와의 삼자대면을 계기로 운디네와 크리스토프는 큰 갈등을 빚는다. 크리스토프는 잠수 작업 도중 사고를 당하고, 운디네는 모두가 예상했듯이 요하네스를 제 손으로 처리한다. 물살을 고요히 가르며 다가와 선명한 눈빛을 빛내며 물속에서 요하네스의 목을 조르는 운디네의 손길에 자비는 없다. 그리고 그녀는, 물의 정령은, 물속으로 종적을 감춘다.
큰 고비를 넘기고 삶을 되찾은 크리스토프는 운디네를 찾아 미친 듯이 헤매지만 결국 그녀를 찾지 못하고, 시간은 흘러 그는 오랜 친구와 결혼해 곧 아이의 아버지가 될 예정이다. 운디네는 그렇게 크리스토프의 가슴 한켠의 잊지 못할 상처로 남았다. 그 흉을 보듬어주는 손길은 역시 물속에서 나타난다. 어느 날 잠수 작업 도중 운디네를 보았다고 확신하는 크리스토프는 다음날 새벽 아무런 장비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오열하는 아내를 어느새 물이 뚝뚝 흐르는 손으로 감싸고 있는 크리스토프의 다른 한 손엔 잠수부 모형이 들려 있다. 운디네인지, 자신인지 모를.
영화 <운디네>의 의문점은 사실 여러 부분에서 남는다. 이를테면 운디네가 크리스토프에게 전화를 걸었던 시간과 크리스토프가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있었던 시간 사이의 비밀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수사망을 좁히듯 진실을 하나하나 밝히려는 자세는 이 영화를 보면서는 그리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설화는 그런 것이니까. 정령, 요정, 신의 속성을 일일이 파헤치려 드는 인간은 벌을 받는 법이다. 그저 한 편의 푸른 동화를 읽는다 여기자.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이른 새벽 어스름, 찰박이는 물속에 시선을 반쯤 가린 채 조심스레 뭍을 살피던 누군가의 마지막 시선이 필요한 영화.
*네이버 지식백과, “운디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012301&cid=41773&categoryId=44396, 2023년 8월 25일 검색.
글쓴이 연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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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오늘 학교의 풍경이 참 평화롭습니다. 건물마다 노란 햇빛이 켜켜이 내리쬐는 것이 가을을 실감하게 하는데요. 이렇게 여유로운 날씨에 나돌아다니지 못하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다들 바쁜 시기를 보내고 계실 듯하네요. 몰입할 구석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지만, 가끔은 마음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는 틈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시간을 쪼개서 좋아하는 것들을 향유하는 것이 일회성 도피가 아니라 어떤 치유에 가까운 일이라고 믿습니다.
또 하나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중간고사 기간을 맞아 저희 시네마떼끄도 2주간 쉬어갈 예정입니다. 휴관 이전에 마지막으로 받아보시는 뉴스레터가 되겠군요! 🥲 시네마떼끄는 더 풍부하고 재미있는 기획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다들 건강하세요! 😊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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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시네마떼끄
ewhacinemathequ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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