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몇 가지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단군 신화, 트로이 목마 전설, 메데이아와 이아로스의 이야기, 하다 못해 예수의 부활까지도. 직접 보고 듣지 못하더라도 사람의 입을, 기록을 따라 전해지는 이야기는 소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내용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지금 알고 있는 내용이 최초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자신하는 이야기가 그대에게는 있는가?
설화는 전하는 자의 신념과 믿음, 의도에 따라 같은 이야기조차 왕의 통치를 지지하는 수단이, 또는 권력자를 끌어내리고자 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고는 한다. 같은 이야기라도 다양한 버전의 기록이 남아있고, 수용자들은 그들 중 마음에 드는 것들만 수용하고 제 방식대로 해석하고 이용하면 그만이다.
그러니 이 역시도 이야기의 한편으로 칠까. 감독들이 자신의 손으로 원작을 재현하며 또 마음대로 뭉갠 설화들을 관객인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즐기면 그만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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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디어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화요일 2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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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사랑
Incendies
드니 빌뇌브 | 2011 | 130’
수요일 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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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디어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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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의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은 죽게 될 것이다. 1) 사지 마비 2) 거식증 3) 안구 출혈의 과정을 거쳐서 말이다. 심장 전문의인 스티븐의 실수로 아버지를 잃은 마틴은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당신 또한 가족을 잃어야 공평하다며 가족 중 하나를 스스로의 손으로 죽이라고 밀한다. 난데없는 비극에 처한 이들이 가엾게 느껴지는가? 글쎄, 꼭 그렇지만도 않다. 란티모스의 영화 속 인물들은 늘 괴이할 정도로 정돈되어 있고 그저 주어진 운명을 수행하는 창조주의 밀랍 인형처럼 보인다. 이러한 특성은 관객들을 공감이 필요 없는 제삼자의 눈으로 이 부조리극을 바라보게 만든다.
부조리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불합리한 것,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킬링 디어>의 모티프가 된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신화에서는 아가멤논 왕이 아르테미스 여신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바쳐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신이 어째서 분노하는지, 왜 인간들이 군말없이 속죄해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화이자 부조리극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스티븐 또한 가족 구성원을 바쳐 마틴의 규율에 따라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처음에는 그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려도 보고 욕도 해 보지만, 이미 아들인 밥과 딸인 킴은 움직일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됐다. 결국 누굴 죽일지 선택하는 일만 남은 상황에서, 각각의 가족 구성원들은 살기 위해 스티븐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호소한다. 아내는 자식이야 또 낳으면 그만이라며 속삭이고, 밥은 평소에 스티븐이 거추장스럽게 여기던 머리를 자르고 두 팔로 기어가 아빠처럼 심장 전문의가 되고 싶다고 한다. 킴은 밥에게 네가 죽으면 네 MP3를 가져도 되냐고 묻는다. 심리를 옥죄는 소름끼치는 배경음악은 덤이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를 ‘이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상태이며 단지 감정으로만 느낄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왜인지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맞설 수 없는 비극에 갇혔다는 것. 반항할 수 없고 왜곡된 규율에 복종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 그 무엇도 바꿀 수 없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한낱 미물의 날갯짓에 불과하다면 당신은 어떤 행동을 취하겠는가? 신이 지은 세트장 안에서 반항하거나 순종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불쾌하지만 어쩐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으니 저항 없이 빠져들게 된다. <킬링 디어>의 거부할 수 없는 몰입감, 보고 나서도 쉽사리 가시지 않는 찝찝한 여운은 이런 부조리함에서 기인한다.
글쓴이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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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서 있다. 전쟁 중인 현실의 상황을 맹렬히 비판하지, 동시에 환상적인 동화의 모습을 기예르모 델 토로의 방식대로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한다. 이 두 세계는 오필리아를 매개로 하여 서로에게 영향을 받는다. 군사 독재 사회의 중직을 맡고 있는 오필리아의 새아버지. 자신보다는 새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개선시키는 것이 목적인 허약한 어머니. 하여 마음을 둘 곳은 어머니와 메르세데스밖에 없는 어린 오필리아는 동화 속 환상 같은 세계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흐릿한 공주 표식을 보고 지하세계의 공주라고 불러 주는 판이 있는 미궁으로.
환상 세계의 오필리아는 다시 지하세계의 공주가 되기 위하여 세 가지의 미션을 실행해야만 한다. 나무를 죽이는 거대 두꺼비에게 비밀의 돌을 먹여서 죽이기, 아이를 잡아먹는 괴물의 방에 있는 칼을 가지고 와 죽이기, 죄 없는 사람의 순결한 피를 제물로 바치기. 허나 말만 들어 보이면 쉬워 보이는 사건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오필리아가 포도에 손을 댔기 때문에 쫓아오는 괴물, 혈육을 바치라고 종용하는 판의 모습은 오필리아를 옥죄이지만, 결국 그들이 원하는 일을 이뤄내고 지하세계에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해피 엔딩으로 영화는 끝난다.
동시에 같이 진행되고 있는 현실은 해피 엔딩이 아니다. 허약한 어머니는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고, 예민하고 난폭한 새아버지는 어머니와 자식인 오필리아보다 잉태된 자식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세상은 혼란스럽고, 매일같이 총소리와 게릴라 전쟁이 일어난다. 결국 오필리아는 현실 세계에서 죽어버린 것까지 완전한 비극 서사를 따른다.
이렇게 상반되는 두 가지 이야기를 영리하게 섞어 놓은 영화는, 여러 그리스 신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늘이 내린 임무를 진행해야만 자격을 얻을 수 있는 헤라클레스 신화, 가족 대신 본인이 진행하는 알케스티스 신화. 지하 세계를 오가면서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오르페우스의 신화의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여러 신화의 모습을 한데 뭉치고, 주인공을 햄릿 속 비극의 주인공으로 유명해진 오펠리아로 설정한 것에서 우리는 이 그로데스크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영화 속에서 동화 같은 면모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글쓴이 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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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오이디푸스의 최후를 지킨 뒤 조국 테베로 돌아온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죽음으로 비게 된 왕좌를 두고 벌어진 두 오빠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의 권력 다툼에 휘말린다. 형제의 싸움에서 승자는 없었다. 두 형제는 서로를 파멸시켰고, 그럼에도 역사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기를 좋아하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오이디푸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안티고네의 삼촌 크레온은 외국의 군대를 끌고 테베를 침략했던 폴리네이케스를 패자로 규명했다. 그리하여 에테오클레스는 엄숙하고 성대한 장례의 영광을 누리며 애국자로 거듭났고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로, 그의 시신은 들판에 버려져 그 누구도 신경 써서는 안 되는 초라한 육신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신화 속 안티고네의 상징이 ‘가족애’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녀가 누구인가. 아버지의 가장 충직했던 딸, 어떻게든 형제를 보듬고 싶었던 동생 안티고네는 폴리네이케스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가족의 장례는 신적 계명이라 여긴 그녀는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에 모래를 뿌려 장례 의식을 치른다. 크레온은 왕명을 어긴 안티고네의 행동에 격노했고,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한 뒤 산 채로 가둔다. 결국 안티고네는 굶어 죽기 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 속 안티고네 이야기다. 이를 21세기 들어 재해석한 소피 데라스페는 영화 <안티고네>를 통해 안티고네의 삶을 한 층 더 파고든다.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큰오빠 에테오클레스와 사건의 용의자로 현장에서 체포된 작은오빠 폴리네이케스. 안티고네는 부모님을 잃고 가족이 힘들게 이민을 와 자리잡은 캐나다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 폴리네이케스를 구하기 위해 폴리네이케스로 변장하고, 오빠를 탈옥시킨 뒤 스스로 감옥에 들어간다. 폴리네이케스의 구명을 위해 합심하던 가족들은 길어지는 법정 다툼과 폴리네이케스의 계속되는 비행으로 점차 지쳐가고, 결국 가족들 내에서도 분화가 일어난다. 그렇게 가족을 지키기 위한 안티고네의 사투는 고독에 싸여간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부모의 죽음, 가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 보이는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의 비행, 폴리네이케스를 구제하기 위한 안티고네의 분투 같은 것들은 모두 안티고네 신화와도 맞닿아 있다.
그러나 영화 속 안티고네는 공주도, 전제 국가의 백성도 아니다. 안티고네는 시민권이라는, 뒤나 닦으라는 ‘종이 한 장’을 얻기 위해 늘 언행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이민자, 즉 소수 집단의 일원이다. 신화와 영화에서 전복된 그녀의 계급과 위치는 상당히 흥미롭다. 영화에서 안티고네는 더 이상 왕족이 아니기에 결핍을 여실히 느낀다. 그리고 안티고네는 더 이상 전제 국가의 백성이 아니기에, 그녀와 그녀의 주변인들은 더 이상 크레온의 명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백성이 아니기에, 안티고네에게 씌워진 ‘죄’는 영화 속에서 신화와는 다른 양상을 향해 간다. 안티고네는 항명한다. 메노이케우스는 항명한다. 하이몬은 항명한다. 안티고네를 모르는 이들도 항명한다. ‘FREE ANTIGONE.’ 안티고네는 여전히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신화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또한 불의에 맞서기 위해 싸운다. 군주의 말이 곧 정의였던 시대에는 가를 수 없던 정의와 불의다. 그러나 21세기의 안티고네와, 사람들은 불의를 인지할 수 있다. 그녀를 겹겹이 둘러싸는 연대와 함께. 그녀는 죽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언제든 심장이 시킨다면 법을 어길 것이다.
글쓴이 연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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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빌뇌브 | 2011 | 130’
수요일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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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너무 잔인하고, 너무 섬세하고, 너무 여려서 자칫하면 깨질 것만 같다. 조금만 잘못 건드리면 그냥 가루가 되어 버릴 것 같다. 그런데 알고 보면 어느 무엇보다도 강하다. 얇은 베일이 아니라 단단한 벽으로 둘러 싸인 것처럼 무겁고, 강하다. 그런데도 그 안에는 무엇보다도 얇고 무른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을린 사랑>은 남매인 잔느와 시몽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자취를 되짚어가는 이야기다. 영화는 어머니의 유언과 함께 시작된다. 시신을 태우지 말고, 관에 넣지 않은 채로 나체로 엎드려 묻어달라는, 또 다른 형과 아버지를 찾아 편지를 전하면 장례와 비석을 허락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들은 이런 부탁이 달갑지 않고, 시몽은 유서를 전달한 장 르벨에게 자신은 동조하지 않겠다며 짜증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잔느는 그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다레쉬로 가 어머니의 과거를 수소문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나왈은 와합과의 아이를 낳은 뒤 바로 떠날 수밖에 없게 됐고, 그 후 아이를 찾기 위해 전쟁중임에도 남부로 떠난다. 그 폭력의 현장을 경험하게 되고, 민족주의에 반대하며 결국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를 암살한다.
영화는 잔느가 어머니의 과거를 알아내는 이야기와, 어머니가 겪었던 참혹한 역사를 반복하여 제시한다. 우리는 잔느의 입장에서 궁금증을 가지고 어머니의 과거를 함께 전해듣다가도, 순식간에 나왈의 시선에서 보여지는 충격적인 장면들 앞에서 무너지게 된다.
크파르 리얏에 수감된 나왈은 갖은 고문을 당하며, 결국 아이를 임신하기에 이른다. ‘노래하는 여인’으로 불리며 한 번의 굴복 없이 온몸으로 모든 걸 견딘 나왈은 출산 후에야 풀려난다. 여기서부터 약간 아리송해진다. 그럼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그토록 찾은 형인 것인가? “1+1이 1이 될 수 있을까?”라는 시몽의 물음이 주는 임팩트는 생각보다도 더 강렬하다.
나왈이 사는 동안 평생 가슴에 짊어졌던 몇 십년의 아픈 그 역사의 무게가 1% 정도는 스크린 너머로 전해졌을까. 감히 판단할 수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끈질긴 비극의 이야기를 겪은 이는 이제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건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넘어, 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극적으로 살아남아, 생사의 경계를 끊임없이 오갔던 사람만이 지켜낼 수 있는 이야기다. 세상을 등지고 싶으니 땅에 뒤집어 묻어달라는 대목이 자꾸만 생각난다. 남은 이들의 경험을 한 번 거치고, 두번째로 스크린을 거쳐 전해지는 이야기임에도 여운은 길고 또 짙다. 모든걸 다 알고 난 뒤에도 “어떤 일이 있어도 널 사랑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 말이 얼마나 큰 의미를 담고 있는지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가끔은 영화 속의 잔느와 시몽처럼, 잠깐은 멈추고 싶기도 하다. 더 이상은 알고 싶지 않은, 차라리 모르고만 싶은. 그런데 이건 단순히 잠깐 눈을 돌린다고 모를 수 있는 잠깐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나왈이 겪었던 고통에 비해서는 아무렇지 않을 만큼의 고통을 껴안고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건 한 사람의 일생이자, 수많은 희생의 과정이고, 결국엔 생생한 역사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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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설화는 참 재미있습니다. 어떤 내용과 함의를 담고 있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우리 모두 어렸을 적부터 한번씩은 진위 모를 옛날 이야기들을 접해 본 적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에서, 고서에서, 혹은 출처도 기억나지 않는 곳에서 온 이 이야기들은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자니 황당할 만큼 부조리하고 막장 아침 드라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대와 윤리관이 발전하며 생긴 허점들은 오히려 새롭게 읽혀 다각적으로 뻗어나갈 여지를 남기기도 합니다. 이번 기획에서는 현대의 관점에서 설화를 재구성한 영화들을 모았습니다. 설화에 대해 잘 모르셔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들이구요, 설화를 잘 아신다면 아는 만큼 재미있으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교차가 큰 요즘입니다. 감기 조심하시구요. 수요일에 두 번째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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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시네마떼끄
ewhacinemathequ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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