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져야 할 문제가 너무 많다. 아니, 책임까지는 지지 않더라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문제가 너무 많다. 최저임금은 그대로인데 뭐가 또 올랐대, 요즘은 청년 실업 문제가, 누가 애인을 때렸는데 걔가 그래서, 알겠는데 피곤하다구요. 이런 문제에 위기의식보다 피곤함을 먼저 느낀다는 것 자체가 답 없는 사이코패스 같겠지만 이미 비슷한 문제를 닳고 닳도록 겪고 들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이에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문제에 휘말릴 수도 있으리라는 불안, 믿고 지냈던 사람이 하루 만에 돌변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무슨 사건이든지 간에 나 또한 예외는 될 수 없다는 두려움.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결국 ‘아, 이 세상은 더럽고 지긋지긋해!’하며 질려버리고 만다. 싹튼 불신은 점점 내 이웃을 넘어 세상 전체를 의심하게 만들고, 피곤해진 우리는 결국 회피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한다.
<메기>는 믿음과 불신에 대한 영화다. 단한번도 나를 믿어준 사람이 없었다는 경진, 같이 일하는 동생이 내 반지를 훔쳐 간 건 아닐까 의심하는 성원, 성원의 전 애인인 지연의 말을 듣고 애인에게 불신을 가지는 윤영. 특이점이 있다면 이들은 불신이라는 상태에 멈춰 있지 않고 계속해서 어떠한 행동을 취한다는 것이다. 마주하는 진실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이들은 행동한다. 믿으면서 진실에 가닿는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대체로 두렵다. 우리는 무언가를 외면하거나 불신하는 방법을 택해 진실로부터 도피하고는 한다. 하지만 정말로 마주할 진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끔찍한 모습을 띠고 있을까? 메기는 때때로 사실관계가 편집되고 과장되어 우리를 괴롭게 할 때, ‘뭔가를 부풀리고 있다면 큰 바늘로 찔러주는‘ 영화이다. 다만 ’아프지 않게‘말이다. 윤영은 성원의 전 애인인 지연으로부터 성원이 자신에게 폭력을 저질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고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지만, 그 고민은 윤영에게 좌절보다 관계를 정리할 용기를 주었다. 결국 누군가를 믿거나 믿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은 진실에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믿고 받아들이자. 그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끔찍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민의 과정에서 무언가가 더 분명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언젠가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면 구덩이를 더 파고 들어갈 것이 아니라 고개를 들어 해를 마주하라고, 그렇게 빠져나오라고, 영화 <메기>는 말하고 있다.
글쓴이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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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벌어졌고, 누구도 사과하지 않는다. 벌어지지 않았던 때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말을 뱉는 건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제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가?
주리는 한 식당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권주리의 아빠 권대원이, 같은 학교 친구인 김윤아의 엄마인 김미희와 바람이 났으니까. 바람만 났나? 미희는 임신한 상태다. 아빠의 불륜 상대를 염탐하다 들킨 주리는 도망치고, 떨어뜨리고 간 핸드폰을 주운 윤아. 둘은 다음날 옥상에서 마주한다. 아, 큰일 났다. 옥상에서 둘은 싸웠고, 주리의 엄마 영주는 불륜 사실을 알았다. 임신한 불륜 상대와 그 딸, 바람난 남자의 아내와 그 딸. 이제 모두가 사실을 알게 됐고, 이들은 서로 마주했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커다란 질문만이 남아있다.
영화는 좀 수상쩍다. 불륜으로 엮인 네 여자는 굳이 꼽자면 한 남자로 연결된 사이가 아닌가. 그럼에도 대원은 수상하리만치 등장이 적다. 카메라 역시 그의 얼굴 따윈 관심도 없다는 태도다. 대원은 믿음직한 아빠도 아니고, 부정을 저질러놓고 도망치기 바쁜 책임감 없는 남자다. 그럼에도 그는 관객에게 큰 미움을 사지 않고 있다. 영화 역시 관객들에게 대원을 증오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건 대원에게 주어진 면죄부가 아니다. 단지 이 영화가 대원의 영화보다는, 주리와 윤아, 영주와 미희의 영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관심이 없는 거고, 원인 제공자라는 무거운 타이틀 아래에서 캐릭터가 너무 큰 눈길(그게 애정이든 분노든)을 끌지 않게 하기 위해 영리한 방식을 취한다. 그는 우습고, 무책임하고, 철저히 주변화된다. 못난이의 탄생 이후 벌어지는 일들에서 대원은 도망칠 때 빼고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짧은 등장마다 관객은 그를 비웃게 되며 그것이 대원이라는 캐릭터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이라고 감독은 생각한 듯하다. 지금껏 배우 김윤석이 맡아온 배역을 떠올려 보자. 영화 속 대원의 얼굴과는 영 어울리지 못한다. 이건 감독 김윤석이 배우로서의 자신에게 보내는 자조이기도 하다.
‘미성년’이라는 제목은 상징적이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미성년. 감독인 김윤석은 ‘성년이 되지 못한 미성년, 아름다운 성년’이라는 중의적인 의미에서 이런 제목을 지었다고 말한다. 미성년인 아이들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일 한복판에 던져진다. 혼자도 아니고 둘이서. 그래서 둘은 싸워야 한다. 듣도 보도 못한, ‘부모의 불륜 상대 딸’이라는 이름이 붙은 관계를 마주해야 한다. 싫다고 안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자꾸 얼굴 맞댈 일이 생긴다. 강화유리까지 깨가며 싸움질하다 서로를 긁어놓은 둘에게 영주는 툭 던진다. ‘싸우지 마, 니들이 왜 싸워?’ 미우나 고우나 서로밖에 없는 관계가 된 둘은 함께 세상에 대처하는 법을 배워간다. 두 미성년은 미숙하지만 솔직하고 담대하다. 그래서 대원도, 미희도, 영주도 하지 못한 일을 불쑥 해내기도 한다. 둘은 못난이와 얼굴을 맞댄다.
5개월, 길면 6개월쯤 자란 아기는 작고 가볍다. 아이가 담긴 상자가 책가방에 쑥 들어갈 정도로. 아이의 뼛가루는 더 가벼웠고 마땅한 함조차 없어서 철제 약통에 담긴다. 아이들은 미희와 대원이 사진을 찍은 놀이동산에 못난이의 뼛가루를 들고 놀러 간다. 세 명 치 요금도 치르고 문 닫은 놀이동산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논다. 가장 끝에 배치된 놀이동산 시퀀스는 마지막 장면으로 충격을 준다. 관객들은 쉽게 불쾌감에 빠진다. 주리는 무슨 생각인지 작은 철제 통 속 가루를 딸기 우유에 타고, 윤아도 거부하지 않는다. 둘은 결연한 표정을 잠시 짓고 우유를 꿀꺽꿀꺽 마신다. 누군가는 불쾌하다고 말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놀이동산에는 대원도, 미희도 없었다. 영주도 마찬가지고. 못난이의 얼굴을 가장 오래 기억할 두 사람이 있다면 그건 윤아와 주리일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누가 이 둘을 말릴 수 있을까.
글쓴이 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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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산장에 어서 오세요.
가족은 한 산장을 인수해 꾸려가려고 한다. 마루 광도 내고 팻말도 땅땅 박아 기껏 꾸민 산장. 손님은커녕 파리 한 마리 날리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날 찾아온 손님은 좀 이상한 소리를 한다. 푹 눌러쓴 모자에 어두운 표정, 안주 없이 주문한 맥주 세 병. 결정적으로, 거스름돈을 준대도 “이젠 필요 없으니까” 하는 터무니없는 소리까지!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된다. 이제 문을 연 산장에서 자살이라니 생계에 큰 위협임은 두말할 것 없고, 가족은 결정한다. 묻자!
이렇게 시작한 시체 암매장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다음 타자라도 되는지 함께 목숨을 끊은 커플, 미수를 강간하려다 폭포에 밀려 떨어진 도로공사 직원… 그냥 좀 먹고살겠다는데 되는 일이 없다. 가족의 태도도 좀 이상하다. 죽음에 대한 죄책감? 글쎄, 사람 하날 묻어놓고도 밥은 넘어가더라. 사람을 묻고 온 날에도 쉽게 웃고 떠드는 이들은 그저 들킬까봐, 그래서 산장이 망할까봐 전전긍긍할 뿐이다.
웃음은 재채기처럼 터져 나온다. 거짓말을 들킬까 조마조마하는 가족들, 그들의 얼렁뚱땅 살인기(記)는 튕겨 맞은 고무줄처럼 관객을 간지럽힌다. 영화 속 죽음은 잔인하지만 우스꽝스러워서 관객을 웃긴다. 웃어도 되는지 잘 몰라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부여잡게 되지만 영화 곳곳에 불균형하게 배치된 음악은 신경도 쓰지 않고 흐른다. 죄책감이라곤 느끼지 못하는 인물들을 비웃는 듯도 보인다.
이 가족은 왜 조용한 가족이 되었을까? 사실은 조용함과는 거리가 먼데 말이다. 이들 가족에게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건 기본이다. 괴팍한 노파를 흉내내거나 새벽까지 텔레비젼을 큰 소리로 틀고 보며 밥상머리에서 대거리를 하고 산장에 온 손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기까지 한다.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들은 자꾸만 땅을 파고 사람을 묻는다. 사람이 죽었는데 죽지 않은 것처럼, 또는 사람을 죽였는데 죽이지 않은 것처럼. 게다가 사람 묻을 구멍을 빠르고 넓게 팔 줄 아는 영민에 자부심을 느끼고 영민은 자랑이라도 하듯 ‘매장’에 대해 농담을 한다. 묻는다는 행위는 무엇인가? 그건 노크 소리를 듣고 숨을 죽이는 순간과도 같다. 폭포에서 떨어져 절뚝이며 살아온 남자를 삽으로 후리고, 자살 시도를 했는데도 살아있는 남자를 또 삽으로 후리고. 매장을 통해 이들은 있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든다. 사실은 웃어서는 안 되는 일로 웃음을 터뜨리는 것도 그렇다. 웃어도 되는 일인지를 떠올리면 웃을 수 없으므로. 그런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는 묻어두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웃을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앞마당에 묻은 시체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족은 계속 떠올려야 한다. 자살한 남자의 지갑과 그 속의 지폐를. 선산에 묻은 시체의 손가락이 놓인 위치를. 우리가 웃음으로 금기를 상기하는 것처럼. (설령 직접 묻은 이의 시체를 두고 웃어넘긴다고 해도.) 그러니 잊지 말 것. 묻혀있던 손가락 위의 흙이 빗물에 쓸려 내려가듯이, 진실은 언제고 솟아오른다.
글쓴이 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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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해 봐. 너희들은 정상이 아니야. 미쳤어! 이 우주 어디에도 니들처럼 같은 종을 학대하고 그걸 즐기는 생물은 없어!“
이 영화를 보는 순간 당신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어떻게 이런 영화가….’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크레딧이 오를 때에는 다른 의미의 ’어떻게 이런 영화가….‘를 맞이할 것이다.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존재한다. 그 너무나도 많은 인간들 사이에선 늘 세상을 뒤흔드는 일이 발생한다. 모두 그런 크고 자극적인 사건들을 바라보고 모두가 집중하는 일들에 시선을 둔다. 아무도 관심 없는 작고 보잘것없는 얘기들은 그게 얼마나 비극적이든 간에 사람들의 작은 시선조차 받지 못한다.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아무리 외쳐도 차가운 사회 속에 묻히게 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래, 어딘가에 그런 불쌍한 사람들이 있을 거야….’ 라는 생각으로 가상의 인물을 위로할 뿐. 거기서 끝인 것이다.
주인공 병구는 이런 사회에서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를 맡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 불행한 학창 시절, 어머니의 억울한 투병. 병구는 이 거대한 사회 속에 버려져 누가 들어도 참 안타까운 인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런 병구가 불행한 삶속에서도 집착하며 놔주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외계인‘이다. 웃기지 않은가? 힘든 삶속에서 자신의 모든 일상을 외계인에 맞춰 살아가는 것은 황당한 웃음을 자아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을 납치해 고문하며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켜낸다는 황당무계한 그의 목표가 처음엔 참 웃겼다. 하지만 외계인을 향한 병구의 매서운 집착과 실행력, 그리고 과거로부터 축적되어 온 그의 불행에 대한 분노를 보며, 어쩌면 그에게 외계인은 단순한 집착이 아닌 그의 불안한 삶을 이끌어온 원동력이 아닐까 싶었다. 폭력으로 덮인 과거를 향한 복수와 지구를 지킨다는 책임감. 그의 삶을 이어온 건 외계인이라는 매개체를 통한 작은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병구는 외로운 삶을 산다. 병구의 의견과 억울한 사연은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가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섭게 사람을 배척한다.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어주고 어쩌다 개인의 미시적인 일들이 주목받는다고 해도 그건 언론을 통해 관심이 쏠린 찰나일 뿐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이러한 사회 속에 무거운 농담을 던진 영화가 아닌가 싶다. 황당한 전개가 웃음을 자아내지만 어쩌면 내가 보지 못했던 사회의 악순환을 날카롭게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설마 했던 결말에 웃음이 나지만 가슴 한편이 씁쓸해지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당신도 영화를 보며 <지구를 지켜라>만의 재치 있는 비판을 즐기길 바란다.
글쓴이 융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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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가 되는 힘으로 다음 순번의 삶을
나나입니다. 이번 한 주도 잘 보내고 계시는지요? 저는 어제도 선배와 아직도 개강이 적응이 안 된다며 하소연을 조금 했습니다. 건물에서 가끔 길을 잃는 것은 덤이고요. (학관에서 수업을 들으시는 분이 계신다면 아마 이해하실지도... 😂)
종종 생각하는 말이 있습니다. 은희경의 '소년을 위로해줘' 작가 코멘트인데요, '식을 때가 가장 좋다. 그게 나를 각성시키고 소설을 쓰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 우리는 사랑이 식는 힘으로 다음 순번의 삶을 산다.' 라는 말입니다. 식는 힘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게 어쩐지 조금은 의지를 북돋아 주지 않나요? 지난 뉴스레터의 코멘트에는 새까맣게 웃고 털어내자는 말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마음이 재가 되는 힘으로 다음 순번의 삶을 살아보자고 달리 말해 보려고 합니다. 시네마떼끄는 늘 열려 있답니다!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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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시네마떼끄
ewhacinemathequ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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