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안녕하세요! ‘산책자 열병’기획을 진행했던 운영위원 오소리입니다.
저는 평소에 도시 산책, 특히 처음 가보는 동네를 산책하는 일을 즐겨하는데요. 그래서 산책에 관한 책을 뒤적거리다 어느 날 ‘플라뇌르’라는 프랑스어 단어와 만났습니다. 플라뇌르는 목적 없이 도시를 걸으며 사색하는, 주로 형편이 넉넉한 신사 남성들을 가리키는 용어였다고 하는데요... 팔자도 좋지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여유롭게 길거리를 걷는 일은 모두에게 열린 행위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도, 21세기 서울에서도, 산책은 어떤 이들에게는 즐거운 유희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아주 위험한 모험이기도 합니다. 이 기획에서는 산책이라는 단어가 가진 가볍고 산뜻한 이미지는 던지고, 길을 걷고 주위를 둘러보는 단순한 행위가 서로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정말 다양한 인물들이 각자 다른 장소에서 다르게 산책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의 도시와 닮았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정말 천사들이 활동하는 도시인 서베를린으로, 분주한 사람들이 가득한 도쿄에서 단정한 건물들이 자리를 지키는 콜럼버스로. 그 속에서 인물들은 어떤 산책을 할까요? 당신은 어떤 산책을 하고 있나요? 이 편지와 영화들이 그 질문의 시작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산책은 좋으니까요. 먼지가 심한 날들을 빼고는 언제라도요.
|
|
|
도시를 산책하는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조건이 요구된다 . 걷다가 위협받는 상황으로부터 안전해야 하며 , 거리 구조물이 당신을 배제하지 않아야 한다 . 누군가 당신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내쫓는 일도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길거리는 의외로 죽기 쉬운 곳이다 . 그런 곳을 산책하고도 무언가 새로운 발견을 한 채로 집에 무사히 돌아오기 위해서 모든 산책자가 마땅히 익혀야 하는 기술은 몸을 잘 숨기는 법이다 . 당신은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 . 목적 없이 걷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 관광객처럼 보이거나 시간 많은 사람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
어떤 사람들은 타고나기를 산책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도시 산책에 따르는 조건들을 이해한다. 혹은 조건에 구애받을 필요 없는 삶을 살거나.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거리에 나가 떠돌기 시작하고서야 산책하는 법을 배운다. 그 순간 거리의 주인공이던 그들은 단숨에 조연 자리로 밀려나고, 도시가 이야기의 주인이 된다. 목적을 잃어버릴 때, 마이크를 붙드는 대신 공간에게 말할 차례를 넘겨줄 때, 우리는 무언가 예상치 못했던 것을 찾아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고 나서 집에 어떻게 도착하느냐지만, 걷기의 순간에 그런 건 딱히 염두에 둘 필요 없다. 한 번 산책한 사람은 다음에도 기꺼이 거리로 나설 것이다. 집과 거리의 경계를 흐리고, 공공장소의 이미지와 하나가 되며. 때때로 하나가 되지 못하며. 그 자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되어 황급히 도망치면서. 도시는 매번 다르게 보일 것이다. 제대로 산책할 줄 안다면.
산책의 형태를 닮은 영화들을 통해 산책자들과 함께할 때, 관객 역시 이야기의 중심을 응시하는 고정된 자리에서 벗어나 프레임 구석구석에 유심해질 수 있다. 그것이 효능 없는 일의 효능이라는 듯이.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는 필름 형태의 떠돎 앞에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영화 속 산책자들은 그런 문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나서고, 관객은 영사기 앞에 앉아 그 모습을 구경한다. 한번 만나고 다시 찾지 못하는 사람들과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뜨거운 커피를 파는 가판대와 불법적인 방법으로 뚫린 창문들을 발견하는 그들의 모습을 빤히 본다. 그러다 문득 관객도 헤매는 법을 깨닫고, 극장 밖으로 나가 걷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간식과 물통과 선글라스를 챙기고, 혹은 아무것도 들지 않고 맨눈으로. 그때 영화는 시작된다. 우리는 그렇게 바란다. 매연 너머에 숨은 무언가를 가까이 다가가 잡아낼 당신의 카메라를 열렬히 기다린다. 그렇게 바라는 마음들이 산책하는 영화들을 만들고 또 만드는 것일 테다.
|
|
|
베를린 천사의 시 Der Himmel über Berlin
|
|
|
전직 경찰 스코티는 고소공포증으로 인한 현기증 때문에 동료를 잃고 퇴직했다. 때마침 연락이 닿은 대학 동창 개빈은 형사였던 그에게 자기 아내를 미행할 것을 부탁한다. 어떤 이유에선지 아내에게서 망령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개빈의 아내 매들린은 매일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몇 시간이고 금문교를 바라보고는 집에 돌아와서, 남편에게는 그저 금문교에 다녀왔다고만 말한다. 다른 누군가가 되어버린 듯한 아내의 모습에 개빈은 진실을 밝혀달라며 친구 스코티를 찾았다. 스코티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를 계기로 매들린을 미행하기 시작한다.
녹색 차를 타고 매들린은 분주히 어딘가를 돌아다닌다. 교구의 무덤 앞에 한참을 서 있는가 하면 미술관을 들어서서는 한 여인의 초상화 앞에서 떠날 줄 모른다. 호텔에 며칠이고 투숙하면서 잠은 자지 않고 오로지 창밖만을 바라보다 집에 돌아가기도 한다. 매들린의 행위는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 그는 도시를 배회하다, 멈춰 섰다, 다시 배회한다. 스코티는 매들린의 행선지가 모두 매들린의 증조모 ‘칼로타’와 관련이 깊음을 알아차린다. 그렇게 미행을 이어가던 도중, 금문교를 바라보던 매들린이 강에 몸을 던지는 일이 일어난다. 스코티는 강에 뛰어들어 매들린을 구하고, 이렇게 둘은 처음 마주한다. 스코티는 이제 매들린과 함께 진실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마주한 날부터 사랑에 빠진 둘은 이제 함께 도시를 거닐며 진실을 향해간다. 그러나 어떤 기억을 떠올린 듯한 매들린은 홀로 종탑 위로 향하고, 현기증 때문에 매들린을 말리지 못한 스코티는 결국 매들린의 죽음을 목격한다.
매들린은 처음 동행을 제안한 스코티에게 이렇게 말한다. “혼자 다니면 방랑자지만, 둘이 다니면 어딘가로 향하게 되죠.” 둘의 동행은 늘 목적지를 상정한다. 그러다 매들린을 잃은 스코티는 다시 방랑자로 돌아간다. 그는 매들린의 흔적을 따라 길을 헤맨다. 매들린과 똑 닮은 주디를 만나기 전까지. 진실은 여기에 있다. 스코티에게 매들린의 미행을 맡긴 개빈은 아내를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시키기 위해 주디를 고용한다. 주디는 매들린을 연기하고, 스코티는 유령에 잠식되어가는 주디/매들린의 모습을 목격한다. 진짜 매들린은 남편에게 살해당했으나 스코티의 목격은 그의 죽음을 자살로 만드는 알리바이가 되어 준다. 이 사실은 스코티의 시선 이면에 있다가, 주디와 마주친 스코티가 그를 사랑하게 되며 점차 드러난다.
주디는 길 위에서 매들린으로 존재한다. 그에게 도시 산책은 관찰되는 것에 의의가 있다. 그는 매들린이자 칼로타로서 무덤가, 미술관, 강가를 산책하고 주디 자신으로서 스코티를 사랑한다. 이렇게 영화가 결말부에 이르기 전까지 주디는 복수의 정체성을 가진다. 그는 도시를 관찰하고 고독을 즐기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시선의 대상이 된다. 이름 없이 도시를 누비며 마음껏 고독하기에 주디/매들린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주디는 거리로 나간다. 스코티는 어떤가. 그는 보는 이도, 본인도 눈치채기 전에 산책을 시작한다. 어느새 그는 배회를 정체성으로 삼고, 자연스레 자신을 산책자로 소개한다. 그러나 스코티는 끝의 끝에 다다라서야 진실을 목도한다. 그는 영화 전반에서 주디/매들린을 관음하지만, 매들린을 잃고서는 칼로타의 환상을 보고, 주디에게서는 매들린의 환상을 본다. 결국 그는 한 번도 주디 자체를 사랑하지 못했고, 진실을 응시한 순간 주디를 잃고 만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산책자는 누구인가. 산책이 도시를 열렬히 관찰하는 행위라면 이를 더 잘 이해한 이는 누구인가? 산책자들은 길 위에서 길 위의 것들을 관찰하고, 발견하고, 어떤 사실에 접근해간다. 이들은 무엇을 관찰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거닌다는 것은 그들이 무엇이 되게 하는가, 혹은 되지 않게 하는가. 반대로 관객은 거리를 거니는 인물들, 지나가는 도시 풍경에서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 산책은 분명 권력과 시선의 문제와 함께한다. 그러나 어설프게 몸을 숨길 수밖에 없더라도, 어떤 이들은 분명 뛰어난 산책자다.
글쓴이 견지 |
|
|
산책은 굳이 따지자면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걷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모르거나 너무 잘 아는 길을 헤매는 행위는 그 시간으로부터 무언가 귀중한 것을 얻어내겠다는 기대감과 어우러져 근본적으로 관찰과 집중의 집요한 행위지만, 무엇을 발견해야 할지가 정해져 있지 않기에 어떤 날은 빈손으로 돌아와야 한다. 허우샤오시엔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그는 어떤 여자가 자기 집 베란다에 빨래를 너는 모습을 집 안에서 가만히 찍는다. 인물의 동선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듯 거리를 둔 카메라는 충분한 시간 동안 인물이 앵글 안팎을 누비는 모습을 관찰하고, 카메라 너머에 있는 우리도 자연스레 인물을 멍하니 본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침착한 관찰자로 있으며 몇 가지 정보를 얻는다. 이 집에 사는 요코는 막 대만 출장에서 돌아왔고, 오늘 고향에 돌아가야 하고, 전화를 걸어 대뜸 이상한 꿈 이야기를 할 만한 친구가 있다. 그러나 아직은 이것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인물들이 하는 어떤 말이건 극의 긴장감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잡담일 가능성이 존재한다.
허우샤오시엔의 카메라가 일상을 수집하듯이 인물들도 진지한 수집가들이다. 요코는 오래전에 도쿄에서 유학했던 대만인 음악가 장원예의 행적을 모으기 위해 여기저기를 방문하고, 그의 전화 상대인 하지메는 전철 소리를 모으기 위해 역들을 찾는다. ‘모으기’는 목적을 요하는 일이지만, 두 인물의 수집과 조사는 그 목적을 위해 서늘한 책상 앞이 아니라 후덥지근한 상점가나 플랫폼에서 시간을 버리는 일을 바탕으로 한다. 그들의 작업은 효율적이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늘 어디론가 떠나고 있기에 전철이 멈추지 않는 도시에서 그런 일을 한다니 이상하지만. 동시에 이런 까다로운 수집은 도쿄이기에 가능하다. 한때 오즈 야스지로가 카메라에 담았고 장원예가 글로 썼고 하지메가 녹음으로 남길, 도시가 된 이래 꼼꼼한 다수의 손으로 기록되어온 곳이기에.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수집의 역사 덕분에 인물들은 ‘15분 뒤에 오챠노미즈에서 만나자’라거나 ‘옛날 긴자 2번지가 여기인가요?’같은 문장을 수고롭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노선도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지 않고도 전차의 방향을 신뢰할 수 있다. 도시 주거자들인 그들은 타인의 방문을 받거나 타인을 방문하거나 통화를 하며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걷는 일에 익숙하다. 그들을 찍고 있는 허우샤오시엔에게는 익숙하면서 익숙하지 않을 공간(도쿄는 그가 사는 곳은 아니지만, 수백 편의 아시아 영화들과 한때 일본 식민지였던 대만의 거리에 대한 본능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에는 가까울지도 모른다)을 요코와 하지메는 막힘없이 걷는다. <카페 뤼미에르>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본 영화의 거장(그리고 빔 벤더스에 따르면 전직 천사) 오즈 야스지로의 인물들이 정착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꾸린 도시인 도쿄는 이제 통행하는 이들의 도시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도시다. 움직이는 이들의 몸을 만드는 도시다. 교차로에서 서로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이제 이곳의 이미지다.
예컨대 월세로 방을 빌려 사는 요코는 태어나기를 도쿄 사람은 아니다. 그는 한 곳에 적을 두기를 거부하며 여행자로서 여러 공간의 산책용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 우리는 그가 도쿄에서 전철 차창에 기댄 모습이나 고향 타치카와에서 부모님 집의 다다미 바닥에 눕거나 고등학교 때 알았던 고양이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직접 보고, 대만에서 만났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듣는다. 그는 어디에서도 괜찮다. 반대로 헌책방을 물려받은 도쿄 토박이 하지메는 헌책방이 속한 공간인 책과 음악의 세계에서는 부족한 정보로도 정답을 찾아낼 정도로 여러 언어를 구사하지만, 가게 밖에서는 전철 그림자에 가려져 외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요코에게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여 준다. 여러 갈래로 향하는 전차들 한가운데에서 그는 웅크리고 있는 아기처럼 그려져 있다. 요코는 말한다. 왠지 하지메 너 안돼 보인다. 도시에서 우리는 길을 잃는가? 물리적으로 길 잃지는 않더라도 앞으로 나가기 위해 또는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 보내는 신호는 언젠가는 반드시 불일치한다. 요코는 대만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대만에도, 남자의 가업이 있는 태국에도 정착하고 싶지 않다. 나 혼자서도 잘 키울 수 있어. 요코는 부모의 염려에 거듭 그렇게 대답한다. 그러나 영화 내내 요코는 태어날 아기와 달라질 삶에 대해서는 아무 준비 없이 떠도는 사람처럼 보인다. 아이는 낳아도 결혼은 하지 않을 거야. 남의 가업 잇는 일에는 휘둘리지 않을 거야. 죄송한데 술도 술잔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의 작은 부엌에는 마련된 물건이 별로 없다. 그가 지금 묻고 있는 장원예의 소식은 지나가 버린 지 오래다. 기억하는 사람은 없고, 기록된 건물의 이름과 지금의 외형은 일치하지 않는다. 통행하는 이들의 도시에서 누군가가 60년 전에 걸었던 산책로는 찾을 수 없다. 요코의 생모는 요코가 어렸을 때 가족을 떠났는데, 그 떠남은 멈추고 싶지 않았다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는가? 영화가 관찰하는 시점의 요코가 그러하듯이? 고개를 돌렸다가 고블린이 아기와 바꿔치기해버린 얼음 덩어리를 안고 엉엉 울게 되어도 아무 소용없다. 요코는 이 이상한 유럽 설화를 꿈에서 본다.
그러나 고분고분하게 일치할 수신호들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조용히 찾아내는 수신호들은 부드럽다. 그들은 부드럽게 어긋난다. 저금한 돈도 없이 월세로 살며 출산을 하겠다고 말하는 요코의 옆에서 인물들은 말을 아끼며 걱정하지만, 아무도 그를 추궁하지 않는다. 요코가 그렇게 하겠다고 말할 때 그들은 그저 그의 주장을 가만히 듣는다. 누구도 하지메가 겪는 외로움에 코웃음 치지 않는다. 마이크를 손에 쥐고 전철을 갈아타는 그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는다. 장원예가 사랑했던 장소들은 모두 변했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 있다. 유학생 음악가와 친구가 되었던 여성은 이제 노인이 되었다. 영화는 극적인 사랑이나 갈등을 기대하지 않으며,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붉어진 표정들에 클로즈업할 의도도 없다. 닥친 사안에 모두가 동의하지 않거나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더라도, 각자가 보내는 신호가 번번이 어긋나고 손과 손이 부딪히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젓가락을 내려놓으려는 손과 자리에 놓인 물건을 치우려는 손이 엉켜도 영화는 티끌 없는 움직임을 위해 그 장면을 삭제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에서 무심하고, 그런 행동은 만남의 양보다는 많은 통행량을 보장할 뿐이지만, 적어도 타인의 목덜미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잡아끌지는 않는다. 대만인인 허우샤오시엔과 마찬가지로 외국인인 우리가 도쿄를 보는 거리가 충분히 가깝지 않아서 그 내부에 아마 분명히 존재할 노여움이나 폭력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건 평온한 일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는 이의 고질적인 문제이니 어떤 이야기꾼도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할 테다. 다만 허우샤오시엔은 삶에 끼어드는 어긋나는 수신호들을 애써 부정하는 종류의 사람은 되지 못하고, 뾰족하고 차가운 무관심을 부드러운 편으로 밀어내는 사람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길을 걷다 다섯 열차가 교차하는 도쿄의 어느 자리를 만나고 마침내 그곳을 매일같이 통행해 온 사람들 각자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글쓴이 오소리 |
|
|
목적 없는 삶은 목적 없이 걷는 일에 적합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목적 없이 걷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고, 삶이 허무하다 해서 떠돎이 좀 더 달큰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키루>의 주인공 와타나베 씨가 할 일을 모두 팽개치고 나와 무작정 거리를 걷는 이유는 아마 삶의 목적 차원에서 뒤늦게 생겨나 버린 결함에 있을 테다. 그가 시청에서 30년이나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온순한 공무원으로 일해 받은 표창장은 암세포가 자라나고 있는 몸뚱이를 찍은 엑스레이 사진을 받아 든 후부터 가치를 잃어버렸다. 고칠 방법 없는, 즉각적이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암시하는 불길함을 가진 질병은 그 이미지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환자의 규칙적인 삶을 일그러뜨리는데, 와타나베 씨의 경우에 그 균열은 파괴적이거나 향락적인 일탈이 되지 못하고 다만 하염없이 걷는 일에 있을 뿐이다. 걷는 길에 만나는 술도 환락가의 여성들도 밤늦게 택시를 잡아타는 일도 아니고, 다만 걷는 일.
그리고 걸음 속에서 그가 감탄하며 발견하는 것은 그가 ‘미라’처럼 멍하니 책상에 앉아 도장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놓쳐버렸던 것들이다. 도쿄의 저녁 하늘에는 어떤 노을이 지는지. 카페에 앉아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얼마나 평화롭던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어째서 누군가에게는 말할 수 있는지. 놀이공원의 음식은 얼마나 맛없으면서도 즐겁게 먹게 되던가. 부하 직원의 스타킹 발목이 해져 있던 것은 어째서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지. ‘의사들이 아무거나 다 먹어도 괜찮다고 하면, 1년도 안 남은 거예요’라는 판정을 단 허한 위장을 데리고 걸으며, 와타나베 씨는 자신이 그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던 일상의 이미지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그때마다 명쾌한 탄성을 내뱉는다. 아! 하지만 감정은 쉽게 쪼그라들고, 그는 감동 대신에 수치심에 사로잡혀 거듭 작은 존재가 된다. 삶은 허무하기보다는 불만스럽다. 왜 이런 아름다운 것들을 내팽개치고 지루하게 살았던 거지? 그러나 그런 식의 질문은 아무 힘도 가지지 않는다. 걸으면 걸을수록 그는 고립된다. 죽기 전에 뭔가 해내야만 하는데. ‘어떻게 하면 자네 같은 젊음의 생기를 얻을 수 있지?’ 와타나베 씨는 시청 일을 관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의 직원에게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런 식의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직원은 대답한다. ‘저는 그냥 일하고 먹을 뿐이에요!’ 걷기는 마법 같은 해결 방법이 아니다. 도시를 헤매는 일은 딱히 건강에 좋지도 않고 (오히려 발이 차가워진다) 매연이나 쓰레기나 더러운 하수도에 노출되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찻집에서 쓸데없이 자릿세를 내는 일에 돈을 쓰는 일이다. 와타나베 씨의 치명적인 질병은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와타나베 씨는 직원이 마지못해 꺼내든, 직접 만든 토끼 인형을 들고 카페를 뛰쳐나간다. ‘뭔가 할 수 있어! 뭔가 할 수 있어!’ 목적 없이 걷기를 통해 그는 목적을 얻는가? 새사람이 되는가? 어디선가 생일 축하 노래가 들려오기는 한다. 그를 위한 노래는 아니다.
그리고 정작 관객은 허무에서 벗어나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그를 보지 못한다. 영화는 그 시점에서 와나타베 씨의 사망 후로 건너뛴다. 장례식에는 시청 관리들이 앉아 있고, 높은 사람들은 와타나베 씨의 마지막 업적에 코웃음을 흘리고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난다. 남은 것은 사람들의 기억이다. 과장님이 하신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관련 없는 사람의 선거 유세에 쓰일 일이었다면. 그래도 과장님은 절대 의견을 굽히지 않으셨어요. 산더미 같은 서류 작업과 계속되는 거부에도. 걷기를 통해 와타나베 씨가 발견한 도시의 이미지들처럼 조각난 회상들에 의지해 그들은 망자의 삶을 순서 없이 엉망진창으로 되돌려내려고 시도한다. 홀로 외롭게 돌아가셨어!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울음을 너무 쉽게 터트리는 상태로.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와타나베 씨의 목적 없는 걷기를 따라다니던 관객을 제외하고는 그 장례식장에 있는 누구도 죽은 이의 심경을 제대로 짚어낼 수 없다. 혹은 그 산책 이후에는 그를 직접 보지 못한 관객도 영영 알아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는 시청의 누구도 손을 대려 하지 않았던 지저분한 하수도를 정비하고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었고, 마지막 순간에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를 목격한 경찰관은 말한다. 눈이 펑펑 오는데, 너무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계셨어요. 진탕 취한 사람들은 소리친다. 오늘부로 달라지겠어! 새로 태어난 것처럼 살겠어! 내일이 되면 잊어버리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도장이나 찍을 뿐이지만. 걷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하지만 누군가가 조용히 목적 없이 걷는다. 와타나베 씨가 만든 공원 위를 산책한다. 그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고. 그래도 우리는 멀리서 그를 발견한다.
글쓴이 오소리 |
|
|
베를린 천사의 시 Der Himmel über Berlin
|
|
|
아이가 아이였을 때, 그는 누구도 구할 수 없다. 아이는 질문하기에 바쁘지, 답을 구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은 춤을 추듯 멜로디를 가지고, 폭격으로 부서진 교회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천사를 아이들만이 올려다본다. 아이가 아닌 이들은 하늘을 보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들이 옆을 지나치는 것도, 자신의 기억을 가만히 듣고 있는 것도, 어깨에 손을 얹는 것도 모른다. 천사들을 따라 벽과 바닥을 넘나들며, 동시다발적으로 쓰이는 중인 수백 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우리는 한 번도 천사들이 날개를 펴고 나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그들의 실체 없는 몸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만큼, 천사들 역시 빔 벤더스가 그리는 현대의 서베를린에서는 신성성 없는 존재들이다. 물고기들만이 수면에서 물을 튀기며 헤엄치던 태고의 시간을 모두 기억하면서도, 200년 전 일어난 사건과 오늘 거리의 어떤 이가 느낀 허무를 연결할 수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기록하고 복기하는 사무적인 차원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들이다. ‘자네는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지?’라고 그들은 묻지만 천사 아닌 이들에게 그것을 들려줄 수는 없으며, 사람들의 연필과 돌멩이는 그들에게는 손에 쥘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 복제된 형상으로밖에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죽어가는 이의 마지막 속마음을 들을 수는 있어도 그들은 사실상 물리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차에 치여 대로변에 누운 사람의 머리에 흐르는 피를 닦으려다 손이 미끄러질 수 없다. 빌딩에서 떨어지는 동독 청년의 헤드폰을 벗기고 제발 그만두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 천사를 보지 못하는 이들은 과거를 바라본다. 어린아이의 눈길이나 폭포에서의 수영을 떠올리고, ‘동쪽은 어디지?’라고 묻는다. 동쪽은 어디지? 천사들은 그들을 구할 수 없다. 흑백의 베를린에서 천사들에게는 매끄럽고 담배 냄새 밴 손가락도 그걸 알아볼 감각도 없을뿐더러, 죽음을 앞둔 이들만큼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먹은 대로 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희망도 잃어버린 것들은 상관하지 않고 사랑하고 싶다는 소망도, 불확실한 대신 선명한 색을 가진 어떤 현재에 대한 상상도 없다. 지저분한 베를린 장벽을 따라 걸으면서도 그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머지않아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영화는 1987년 공개되었는데, 장벽은 1989년 목적을 잃어버렸다) 적어도 빔 벤더스의 천사들은 빠르게 날며 시간을 뛰어넘지도 천명을 전달하지도 예언하지도 않으며, 그저 우리 옆을 산책한다. 날갯짓으로는 로마인들이 노예들을 굶주린 사자들 앞에 세우는 것도 막을 수 없고, 환기구 없는 방에 가스가 흐르는 것도 막을 수 없고, 나라가 사람들을 해치는 것도, 사람들이 사람들을 막는 것도, 자를 대고 국경을 그리는 것도, 비행기가 건물과 부딪히는 것도 막을 수 없고. 날짜들도 숫자들도 막을 수 없고. 바람을 느끼며 ‘지금! 지금!’이라고 외치지 못하지만 그런 외침의 순간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상태로 걷는다.
그러나 경계로서의 장벽이 사실 언제든 붕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사와 인간, 흑백과 색의 경계 역시 공고하지 못하다. 영화는 천사 다미엘과 인간 곡예사 마리온의 위치로 경계를 흐리고 그 자리에 어떤 상처가 남았건 그것을 봉합하고자 시도한다. 다미엘과 마리온은 자신의 종족에게 주어진 것 이상을 바라는 이들이다. 천사는 인간의 감각을 갖기를 욕망한다. 설탕도 우유도 넣지 않은 인스턴트 커피의 씁쓸한 맛과 혀를 데일 듯한 뜨거움을 지켜보는 대신 경험하기를 바란다. 무너진 서커스에서 새 깃털로 만든 조잡한 날개를 달고 곡예를 하는 마리온은 바쁘게 텐트를 접고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의 시간 사이에 멈춰 서서 천사의 질문을 한다.‘나의 존재에 시작과 끝이 있나? 모든 것이 끝난 다음 나는 어디로 가는가?’ 질문과 질문의 열망이 교차하는 순간 마침 베를린에 있는 그들은 마리온의 꿈을 통해 첫 접촉에 성공한다. 잡히지 않던 이종족의 손을 잡는다. 다음 손잡기가 곧바로 시도된다. 다미엘은 그를 볼 수 있는 듯이 말을 거는 미국인 영화배우가 뻗은 손을 잡아 본다.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천사는 이 두 번의 접촉을 통해 색의 공간으로 진입할 준비를 마친다. 인간이 된다면 천사의 권리를 잊어버린다. 이제 그는 기록하거나 불멸하지 못한다. 옷은 사 입어야 하고 오지 않을 사람은 기다려야 한다.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도 있다. 다미엘은 전직 천사로서의 능력, 즉 과거를 기억하는 능력은 잃지 않은 특수한 이방인으로서 이제 뒤로 돌아 미래라는 전방을 주시한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사과와 빵만 먹어도 살 수 있었다. 여전히 그렇다. 이렇게 말할 때 아이의 시간은 이제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움직이는 몸의 시간과 대등한 것이 된다. 앞날의 운명은 몰라도 이제 결단을 내릴 때에요. 마리온은 재촉한다. 우린 우리 둘만이 아닌 어떤 것을 형상화하고 있어요. 그 너머에 다미엘이 있다는 듯이, 처음으로 정면에서 스크린을 정확히 바라보며 요구하는 마리온의 얼굴에는 일리가 있다. 장벽이 여전히 존재하던 베를린의 시공간에서 나와도, 물리적 실체인 필름이자 기억 장치인 영화는 어떤 이의 기억 속에서건 죽지 않으며, 재생산과 잉태의 상징적 순간 없이도 그들은 이야기의 보호자들이다. 다만 그들은 여전히 추억하지도 예언하지도 않으며, 그저 걷는다. 호메로스가 그러했듯이. 호메로스의 유명세에 묻힌 많은 훌륭한 음유시인이 그러했듯이. 언젠가 벤야민이 말했던, 미래로 흐르는 무자비한 폭풍우에 맥없이 휩쓸리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역사의 천사가 된 이야기꾼들은 이제 언제든 돌아볼 준비가 되어 있다. 바람의 힘으로 항로를 바꾸기 위해. 지금! 지금!
글쓴이 오소리 |
|
|
📮5월의 첫 날이에요.
지난했던 시험기간 무탈히 보내셨나요? 문을 닫은 시네마떼끄도 긴 4월을 보내고, 다음 주 개관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개관보다 한 주 앞서 뉴스레터를 재개했습니다. 상영이 없는 기간에는 지난 상영 이야기를 보내드리겠다고 미리 말씀 드렸었는데요. 이번 편지에는 23년 1학기의 가장 첫 기획상영이었던 <산책자 열병>을 담았습니다. 여러분은 산책하기를 좋아하시나요? 산책하며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포착한 기억은 있으신가요? 이 기획과 함께 생각해보게 되신다면 기쁘겠습니다.
더불어, 오늘은 조금 특별한 소식과 함께합니다. 지난 대동제의 시네마떼끄를 다들 기억하시는지요? 😏 운영위원들은 올해도 대동제를 맞아 물밑작업에 한창이랍니다. 뉴스레터와 함께, 인스타그램이나 에브리타임 등에도 오늘 내로 공지가 올라갈 예정이에요. 작년 철야상영회를 성황리에 마무리한 만큼, 올해도 즐거운 관람이 되실 수 있게 열심히 준비 중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깜짝공지💥를 참고해주세요. 부디 이번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그럼, 수요일에 다시 올게요.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
|
|
💥깜짝공지💥 2023 대동제 철야상영회
-눈에는 눈: 교차하는 시선과 홍콩 로망스 |
|
|
이화 시네마떼끄 2023 대동제 철야상영회의 관객을 모집합니다.
2023년, 다시 5월에 개최되는 대동제를 맞아 이화 시네마떼끄도 작년에 이어 세 번째 철야상영회를 개최합니다. 5월 11일 목요일에서 12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학문관 343호에서 열리는 이번 철야상영회의 주제는 홍콩 로맨스 영화들을 담은 <눈에는 눈: 교차하는 시선과 홍콩 로망스>입니다. 막 더워지기 시작한 봄밤에, 지나간 홍콩의 모습을 되살리는 영화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과거와 오늘의 홍콩, 그리고 영화 사랑하는 이들로서 우리의 관계를 비추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장국영, 매염방, 장만옥 등 우리가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는 홍콩 스타들의 아름다운 모습도 만나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일시: 2023년 5월 11일 (목) 오후 10시 40분 ~ 5월 12일 (금) 오전 4시 33분
🎬장소: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문화관 343호 이화 시네마떼끄
🍿본 프로그램 상영작 첨밀밀 1996 | 진가신 | 118' 10:40-12:38 휴식 (17분) 금지옥엽 1994 | 진가신 | 107' 12:55-2:42 휴식 (18분) 연지구 1987 | 관금붕 | 93' 3:00-4:33
추가 상영작 친니친니 안나마덕련나 1997 | 해중문 1시간 30분 4:45-6:15
✔️자세한 공지 및 신청은 이화 시네마떼끄 인스타그램(@cithe_ewha)에서 확인 부탁드립니다. 관련 공지는 5/1(월) 내로 인스타그램에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본 행사는 이화여자대학교 재(휴)학생을 대상으로 합니다.
✔️철야상영회에 관해 문의 사항이 있으신 경우 인스타그램으로 문의해주세요.
|
|
|
이화 시네마떼끄
ewhacinematheque@gmail.com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