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영화제의 묘미라고 한다면 단연 한국에서 정식 개봉하지 않을 것 같은 해외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일 텐데요. 그래서 라틴아메리카 영화에 관심이 있는 글쓴이는 영화제에 갈 때 어떤 라틴아메리카 영화가 상영되는지를 가장 먼저 살펴본답니다. 그런 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전주국제영화제는 특히 라틴아메리카 영화의 양도 질도 훌륭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래서 올해에도 콜롬비아 실험영화인 <무성영화의 기억>, 브라질의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한 극영화인 <삼바의 아버지 피싱기냐>, 칠레 스릴러인 <1976>을 보고 배부르게 돌아왔습니다. 그 중에서 이번에 소개하고 싶은 영화는 칠레 출신인 마누엘라 마르텔리 감독의 장편 데뷔작 <1976>입니다. 

  이 영화는 피노쳇 정권의 독재 치하였던 1976년의 칠레에 살고 있는 카르멘이라는 중산층 여성을 주인공으로 합니다. 영화 내내 카르멘에게 주어진 표면적인 의무는, 도시에서 대학병원 의사로 일하는 남편과 성공해 독립한 자식들이 주말에 돌아올 수 있는 해변 별장을 꾸미는 일이에요. 그러나 이 일은 카르멘에게는 어떤 호기심이나 즐거움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카르멘은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침실에서도 피곤한 얼굴로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를 못하고, 거실 벽을 칠할 페인트를 사러 나가서는 고급스러운 군청색 구두에 분홍색 페인트를 흘리고 맙니다. 그러나 남편과 딸들이 방문해 와인을 마시는 저녁 식사에도, 자러 가지 않겠다고 투정 부리는 손자들을 껴안고 늦게까지 영화를 보는 저녁에도 집중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조용하고 단정한 색으로 가득한 카르멘과 별장에서의 삶에서 조금만 버스를 타고 나가면 총상을 입고 성당 구석에 피신해 있거나, 운이 나쁘면 길거리에서 마구잡이로 체포되거나, 어제 산책을 나간 바로 그 해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카르멘은 지역 신부의 부탁을 받고 비밀리에 부상당한 청년을 간호하게 되는데, 그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삶 속에서 발견되는 폭력의 징후들은 감출 수 없게 됩니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별장은 눈 돌리고 싶은 일들로부터 안전할 것 같지만, 느리더라도 침투는 정확합니다. 반정부 운동가들을 ‘기생충들’이라고 부르는 남편의 친구들이나 엄마가 소일거리로 ‘맹인들에게 책 읽어주는 일을 한다‘고 말하는 자식들 앞에서 카르멘은 조용히 구역질을 참을 뿐입니다. 

  가족들의 반대로 의사가 되지 못했던 카르멘은 그 대신 받을 수 있었던 간호 교육으로 거리에서 살해당할 수도 있는 사람들을 살리고,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이들과 공모하고,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의 생사도 위협할 수 있다는 불안을 겪으면서도 침투하는 폭력을 겪는 이들을 만나고 위로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어떤 용기있는 이들도 실수 없이 완벽하게 임무를 해내는 영웅은 아닙니다. 오히려 영화 내내 관객을 압도하는 것은 공포뿐입니다. 영화는 구두에 떨어져 자국을 남기는 페인트처럼 인물들을 덮는 불안을, 별장과 마을을 구성하는 일상 사물들을 통해 잡아냅니다. 경찰 검문을 통과하고 돌아온 밤중에 어두운 집안을 비추는 등대의 불빛이나 반정부 운동가와의 접촉 장소로 향하는 길에 라디오에서 들리는 ’안녕하세요! 칠레-!‘ 같은 밝은 목소리, 디저트로 낼 머랭에 들어가는 붉은 식용색소 같은 파도처럼 금방 사라질 균열을 통해 관객은 카르멘이 느낄 공포를 영화 내내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보호한다고 믿었던 안전한 거품에서 나온 카르멘은 결국 잘 모르는 이들을 안으며, 피흘림 앞에서 모두가 눈을 돌리는 이상한 현상에서 스스로 균열이 되기로 합니다. 거울 앞에서 슬퍼하는 이를 꼭 붙들고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요. 다시 별장으로 돌아갈 때는 찬 바닷바람을 오래 맞으며 눈물 자국을 지워야 할지라도, 카르멘을 따라 과거의 칠레를 본 관객에게 그의 균열 되기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다른 곳들과 비슷하지만 아주 다르게, 라틴 아메리카에도 존재하는 역사 속의 폭력과 상처는 바쁘게 영화를 만드는 이들을 통해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1976>를 포함한 최신의 라틴아메리카 영화들은, 현대 라틴아메리카의 풍경 뿐만 아니라 독재, 식민주의와 같이 과거에서 비롯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기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먼 한국에까지 알려질 기회가 다른 영화들에 비해 적다고 하더라도, 라틴아메리카 영화가 품은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전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가장 새로운 이야기들이 모이는 영화제라는 기회를 통해서요. 더 많은 라틴아메리카의 이야기가 한국의 관객에게도 닿을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은, 바로 이런 기회에 영화제에 방문해 그런 영화들이 주목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전세계의 국제영화제에서 전혀 다른 곳들의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서로를 교차하며 연관되고 있으니까요. 여러분도 전주국제영화제에 방문하신다면, 평소에 접할 기회가 적었던 라틴아메리카 영화에 관심을 가져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어쩌면 여러분의 세계를 뒤집을지도 모르는,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글쓴이 오소리 

  심상 지도로 여행지를 기록하는 것은 얼마 되지 않은 다짐입니다. 웹 지도를 참고하지 않다 보니 어떤 길을 막아버리기도 하고 실제와는 다르게 그리기도 하지만 사진과 함께 보면 추억이 좀 더 살아나지 않을까 기대하게 됩니다.
  전주국제영화제로 공간에 장소성을 부여하는 건 정말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전주하면 막연히 떠올리는 위치와 관광지가 아니라 제 나름의 전주를 꺼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내년에 전국제를 또 간다고 해도 조금은 눈에 익은 거리를 거닐고 좋아하게 된 음식점을 가고 영화와 영화 사이에 허덕이며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익숙한 영화관 의자에 앉아 새로운 영화를 보고, 이미 그려진 지도가 조금 더 선명해지는 정도로만 그칠 수도 있겠지만, 이 지도의 빈 곳을 조금이라도 더 채워 넣고 더 넓은 범위를 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떼 운영위원들 각자가 전국제에서 봤던 영화를, 전국제의 추억을 이번 기회를 통해 여러분들과 공유하였는데 여러분들의 감상이 궁금해집니다. 여러분들의 전주와 저희들의 전주를 비교해 보고 싶네요.

*제목은 전주 완산구의 면적 중 사진 속 심상 지도의 면적을 의미함.

글쓴이 간장

글쓴이 견지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방문한 전주. 계속해서 내린 비로 궂은 날씨가 이어져서 아쉬웠지만, 영화와 함께한 5월 첫째 주는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특히나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한 영화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이번에 소개드릴 영화는 전쟁 중 부모와 함께 살 수 없게 된 어린이들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파편들의 집>입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가는 개인을 보호할 수 없게 되고, 모두의 일상이 무너져 더 이상 개인이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부모들은 알코올 중독 등으로 더 이상 아이들을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에바’, ‘사샤’, ‘콜랴’는 각자의 사연으로 그러한 부모로부터 떨어져 여기 ‘쉼터’에 모이게 됩니다. 쉼터에서 친구들과 지내는 하루하루가 즐거워 보이지만, 부모와의 연락은 제대로 되지 않고 쉼터에서 계속해서 지낼 수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항상 두려움과 불안감을 가진 채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부모와 함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아이들을 절망으로 내몰고, 영화는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냅니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하는 것은 사실상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부모에게 돌봄을 받지 못해 쉼터에서 지낸 아이는 어른이 되어 자신의 아이를 쉼터에 보내게 됩니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파괴했고, 계속해서 반복되는 폭력 속에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은 회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지낼 수 없습니다. 쉼터를 담당하는 사회 복지사들은 아이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부모의 친권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할머니와 함께 살거나, 다른 가정으로 보내지거나, 쉼터에서의 기간을 다 채우고 끝끝내 보육 시설로 보내집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아이들의 삶, 에바, 사샤, 콜랴의 삶이 행복하기 바랄 뿐입니다.
 영화에 관심이 가시나요? 영화는 5월에 진행된 ‘11회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도 상영이 되었습니다. 이번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에서도 상영될 예정이니 영화 <파편들의 집>을 만나보고 싶다면 7월에 부산을 방문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글쓴이  후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