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과 창 사이를 걷기

  편지는 글 못 읽는 사람에게는 비밀의 창구가 아니다. ‘나도 당신 속에 갇혀있어요’라는 사랑 고백도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원망도 기쁜 소식이나 깊은 그리움이나 ‘사랑하는 아빠에게’, ‘‘조제프 마리아 다 실바에게’와 같은 이름들까지도, 글 없이 편지 쓰기 앞에서는 전부 폭로된다. 촛불을 앞에 두고 조용히 봉해질 수 없을 때, 편지는 누구에게나 공개될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말했듯, ‘직접, 전령 없이, 오직 당신에게만 전하고 싶’은 말들은 편지하는 문맹인의 손을 통해서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의 편지는 따라서 번잡한 공공장소인 리우데자네이루 중앙역에서, 돈을 받고 글을 써주는 중년 여자에게 읊어져야 한다. 그리고 불특정다수인 영화 밖의 관객에게까지 불가피하게 노출되어 버린다. 
  이 모든 일은 위험하다. 편지에 담기는 말은 수신인과 발신인 사이에서만 유효성을 가지는 문장 구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편지가 전해질지 아닐지 확신할 수 없는 작성의 순간에, 내용을 소리 내어 말한다고 하더라도 타자에게 그 의미가 전해질 리는 없다. 편지 작성으로 돈을 버는 은퇴한 교사 도라에게 글씨들은 함부로 판단하고 찢어 버려도 되는 것들이다. 그 말들이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사람에게 무사히 보내지건 말건 아무 상관도 없다. 실제로 편지를 보내지도 않는다. 돈을 세고 나면 서랍에 처박아둔다. 매일 중앙역 구석에 앉아, 열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며 수만 명의 얼굴을 보고 그중 몇 명에게서는 비밀을 직접 들으면서도 도라는 사람들과 자기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좁히려 하지 않는다. 모든 일은 그저 창문 밖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조명을 번쩍이며 지나가는 열차는 시끄럽긴 하지만 아파트 창문 너머에서만 직접적인 존재감을 가질 뿐이고, 역 밖에서 버스에 치인 여자나 총을 맞은 소매치기의 일은 짐작을 통해서만 떠듬떠듬 알 수 있다. 그와 반대로 도라보다 더 먼 거리에서, 스크린이라는 다른 창을 두고 편지 읊는 이들과 대면하는 관객의 거리는 더욱 멀어서, 순간 모든 편지가 각각 아름답게 장식된 시처럼 들린다. 낯 모르는 사람들의 사연을 어쩐지 죄짓는 기분으로 들으며 관객은 엿듣기의 쾌감을 경험한다. 관객 역시 도라처럼 금방 흘러가는 풍경이나 사람들 무리인 것처럼 영화 속 브라질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때론 그 눈앞의 것에 마음이 동하고 말지라도. 버스 사고로 하루아침에 엄마를 잃고 역에서 방황하는 어린이 조슈에를 도라가 데려가 돈을 받고 수상쩍은 곳에 넘겨버릴 때도 답답함에 눈물지을지언정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술주정뱅이라는 아빠를 찾아가겠다는 조슈에를 따라가면서도 그저 그 앞에 더 나은 삶이 있을 거라는 소망밖에는 걸 수 없다. 우리 역시 영화와 현재 사이의 경계를 좁힐 수 없다. 
  그 와중에도 도라는 계속 창을 통해서만 세상을 본다. 돈을 벌어 새로 산 텔레비전 화면을, 반사되어 천장을 비추는 열차 불빛을, ‘세상에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 거야!’라는 말을 이기지 못하고 조슈에를 위험에서 구하고 도망자가 된 후에도 먼 길을 며칠이고 가로지르는 버스 창밖을, 잃어버린 것들이 있는 도로를 응시한다. 하지만 잃어버린 것들은 잃어버렸을 뿐이고, 이미 날려버린 히치하이킹의 기회나 놓고 내린 돈다발은 회수할 수 없다. 비열한 시도나 ‘네 부모가 널 낳은 건 실수야!’ 같은 말 역시 주워 담을 수 없다. 제대로 묻어주지 못하고 온 죽음처럼. 거리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열차가 지나가며 내뿜는 불빛은 밤낮없이 밝으면서도 빠르게 깜빡이며 지나가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의 항상성을 믿을 수 없고 아마 실제로도 영원히 켜져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설령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도라는 조슈에가 자신의 말에 화를 내며 군중 속으로 뛰어들자, 그때까지 창밖을 보듯 조슈에를 바라보던 데에서 벗어나 마구 소리를 지르며 그를 찾으러 뒤쫓아간다. 구원이나 정화를 바라는 종교 행사의 인파 속으로, 촛불이나 엽서나 죽은 이들의 사진이나 성모상 사이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도라는 처음으로 창밖을 걷는다. 모르는 동네의 시장에서 쓰인 대필 편지는 처음으로 부쳐진다. ‘오직 당신에게’도 전해지지 못했던 편지들은 이제 중간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으로 남지 않고 도착의 가능성을 가진다. 어쩌면 누군가를 멀리까지 움직일 가능성도.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기는 어렵다. 조슈에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매일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당신만이 내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같은 묵직한 문장을 남기고도 영영 만나지 못한다. 조슈에가 찾은 건 배다른 형들 뿐이다. 아버지는 한참 전에 편지 한 장만 남기고 돌아오지도 않는다. 언젠가 도라가 걱정한 것처럼 조슈에는 도라와의 여행을 언젠가 잊을지도 모른다. 조슈에를 형들 사이에 두고 떠나며 도라가 조슈에에게 보내는 편지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더라도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조슈에에게 읽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영영 읽히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잊음과 잃어버림 사이에도, 도라와 조슈에가 보낸 어떤 시점의 현재는 반드시 존재했으며 그들이 그 자리에 있었음은 변하지 않는다. 어쩌면 영화가 몇 년이 지나건 사라지지 않고 남기에, 좁힐 수 없는 막연한 거리에서 그들을 바라본 우리 관객이야말로 이 사실의 자격 있는 증인일지도 모른다. 조슈에의 부모, 아나와 제슈스의 초상화 아래에 그들이 쓴 말들을 안전히 놓아두고 나오며 도라는 편지에 이렇게 쓴다. ‘날 기억하고 싶을 땐 우리의 작은 사진을 꺼내 보렴. 그리운 게 너무 많아. 도라.’ 그러나 이 글에서의 그리움은 ‘그리움’보다 더 복잡하다. 과거에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앞으로도 영영 찾을 수 없을 것을 그리는 마음을 뜻하는 포르투갈어 ‘사우다지’는 브라질 사람이 아닌 누군가에게는 온전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그리움이나 텅 빔이나 공허함이나 서글픔 따위로, 멋대로 부정확하게 전달될 것이다. 외국인인 우리는 뿌연 창문 사이로 그 말을 지켜볼 것이다. 
  그럼에도 도라와 조슈에가 하나씩 나누어 가진, 조잡한 성 씨스로 모형과 함께 찍은 작은 이미지는 과거의 상징으로서, 어느 한쪽으로 향하는 단방향의 불투명한 편지가 아니라 한 장씩 공평하게 보내진 그림엽서로서 그들 각자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종이 위의 언어가 가진 역할을 대신하여 사진은 그들에게 서로를 바라볼 하나의 창문을 제공하고, 영화가 끝나며 우리는 그들의 삶이 앞으로 창을 사이에 두고 변화할 것이라 예상한다. 그다음 이야기는 찍혀 있지도 쓰여 있지도 않음에도. 우리도 창문 사이를 걷고 싶다. 불가피한 거리를 가진 모습들 사이를. 어딘가의 역에서 그렇게 바라는 마음을 글로 옮기기는 더욱 어렵다. 

*로런 엘킨, 『도시를 걷는 여자들』, 반비, 354p.에서 재인용. 자크 데리다, 『우편 엽서』.

글쓴이 오소리 

   이상하게 여자들만 아는 것들이 있다. 여자들만 아는 눈빛, 표정, 웃음부터 시작해서 여자들만 아는 고통까지. 여자라고 남자랑 딱히 다른 걸 배우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그렇다. 그건 아마 세상이 교묘하게 여자들을 좀 더 가르치기 때문일 거다.

글쓴이 라임

  ✒️글쓴이의 한마디

안녕하세요, 라임입니다. 이번에 소개하게 된 페이퍼는 <여성 버디 무비> 기획 세미나를 진행하며 작성했던 페이퍼예요. <더 히트>는 응원하고 싶은 미친 여자 둘이 등장해 감각적이고도 통쾌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매력적이라 참 마음에 들었던 영화인데, 아쉽게도 <나를 차버린 스파이>와 비슷하다는 판단에 최종 상영작에서는 제외되었답니다. 여러분과 꼭 나누고 싶었던 영화라 이렇게 소개할 수 있게 되어 기뻐요! 뜨거운 여름, 23년 상반기를 열심히 살아낸 나에게 속이 뻥 뚫리는 영화 한 편 선물하는 건 어떨까요?🔥 기분 좋은 액션 영화 <더 히트>! 제가 보장합니다👍🏻

글쓴이 후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