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Kirschblüten - Hanami
목요일 2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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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된거야 Tout s'est bien passé
금요일 2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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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Kirschblüten - Hanam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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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성하는 어떤 것들은 너무 무거워서 여기 두고 가야 한다. 비단 기모노나 부드러운 카디건 말고. 팔랑거리는 사진들 말고. 잘못 숨 쉬면 들이마실 것 같은 뼛가루 말고. 젓가락으로 집어 올릴 수 있는 것들 말고. 비행기에 혼자서도 오를 수 있을 때는 몰랐는데, 알고 보니 살점 같은 것은, 머리카락이나 만질 수 있는 거친 피부는 두고 가야 한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면서도 불안한 두 명 대신 그대로 불안한 나랑 여행 가방 하나, 꽃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 상자 하나여야 한다. 무거운 것들은 여기 두고 가야 한다. 당신이 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쩐담. 그런데 당신 어디 있어? 뭐든 알 수 있을 듯했는데 사실 아니었을 때, 앞에서 누가 우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음을 한참 지나고 알았을 때, 내 어색한 눈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 어떡해야 하나? 도리스 되리가 그리는 도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도시다. 병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는지 어쨌는지 하루아침에 죽은 아내 때문에 혼자가 된 독일인 남자 루디에게는 어떤 곳이건 잘 읽어낼 수 없는 곳이다. 아내와 함께 다 큰 자식들을 방문하러 갔던 베를린은 미적지근한 반김과 말다툼과 파리를 죽이려고 식탁을 쾅 치는 소리 말고는 없는 감동 없는 곳이다. 전철역에서는 기계로 표를 구매하기가 어려워서 짜증만 난다. 아내가 보려는 일본 무용 공연에서는 외국인이 몸을 예상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일그러트린다. 난 지금 춤추기 싫어. 아내의 요청에 마지못해 따라 하기는 하지만 그 외국 춤이 대체 어쨌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말은 별로 하지 않고, 손자들을 게임에 빠져 있고, 아이들은 자기들끼리만 속닥거리고. 작은 아들은 거기 있지도 않다. 도쿄에 대해서도 후지산에 대해서도 잘 모르듯이 루디에게는 베를린도, 말이 통할 뿐 적당히 모르는 곳이다.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니까 좋은 것도 아니다. 별로 관심도 없다. 루디의 내키지 않음처럼 카메라도 비척비척 따라다니면서 그 옆에 앉아 있는다. 화질이 썩 별로인 조그만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걸어 다니며 찍은 것처럼, 루디의 여행에는 흔들림 없는 매끄러운 이동 장면도 없고, 눈속임하는 커트 장면도 없고,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누가 뭔가 극적인 말을 하면 황급히 줌 버튼을 조절하는 것 같은 성급한 장면만 있다. 아무도 아름답게 찍히지 않는다. 도시들은 그림엽서에서 본 것만큼 근사하지 못하다. 일본 전통 무용인 부토 무용수가 되고 싶어했던 루디의 아내 트루디가 아들 칼이 사는 도쿄를 기꺼이 방문하기를 원했던 것과는 다르게 루디를 찍는 카메라는 막상 도쿄에 가서도 어딘가 어정쩡하다. 어떤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루디가 동양인들로 가득 찬 지하철역에서 멀뚱히 서 있는 것처럼. 도쿄는 바쁜 아들이 출근하기 전에 하는 귀찮은 투의 당부처럼 길도 무진장 복잡한 데다가, 누군가를 따라가면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업종들뿐이고, 사람들은 꽃나무 밑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술을 마시고, 사람이 너무 많고, 사람이 너무 많다. 정갈한 우키요에에서 찾을 수 있던 얌전함은 없고, 베를린보다 북적이는 도시일 뿐이다. 독일인인 아들 칼도 그곳에 빨려든 듯이 정신없이 일한다. 여기서는 주말에도 바빠요. 분리수거도 하지 않고 소파에서 몸을 구기고 잠이 든다. 후지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도시는 실망스럽다. 루디가 알고 있던 잘 짜인 오리엔탈리즘은 없고,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만 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종종 예상할 수 없듯 루디는 말이 안 통한다고 아들의 아파트 방에 앉아 매일을 보내는 사람은 아니다. 손수건을 난간에 묶어 놓고, 아내의 카디건을 입고 어딘가로 나가는 사람이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라면 굳이 그러지 않았겠지만, 도쿄에는 아내가 왔더라면 봤을 것들, 또 미처 기대하지 않았을 것들이 가득 있고, 죽은 아내를 그런 무작위의 체험으로 조금은 구체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책 없는 여행(하지만 손수건이 있으니 대책이 영 없는 것도 아니다)으로 루디는 공원 구석에서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양쪽 끝이 모두 수화기인 전화선을 들고 춤을 추고 텐트촌에서 잠을 자는 여자 유를 만난다. 춤추는 유의 몸은 그때까지 얼결에 마주쳤던 일본인들의 몸과 여전히 어떤 부분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루디가 처음으로 가까이 가서 물었기 때문이다. 알 유 어 댄서? 어 부토 댄서? 유는 죽은 엄마를 위해 춤을 춘다. 나는 엄마와 언제나 통화 중이에요. 루디는 유를 따라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림자를 보세요. 과거의 기억과 바람을 느끼세요. 아내가 추던 춤을 이어받는다. 카메라의 태도는 변하지 않지만, 루디는 유와 매일 만나며 아내 트루디의 방식을 이어받는다. 돗자리를 말고 흙바닥에 누워 양배추 롤이 되거나, 대뜸 여행을 함께 가자고 말하는 식으로. 잃어버린 듯하던 아내의 춤을 배우며 분주한 도쿄 사람들 사이에서 외국인의 얼굴을 하고도 흐릿하기만 하던 루디의 존재 역시 점점 선명해진다. 여전한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도 루디는 트루디를 애도해내기를, 세계에 애정을 가지기를 성공한다. 잠자는 아들의 손을 만져 보거나 유의 여행 가방을 대신 끌어 주면서. 후지산이 보이는 맑은 새벽에 혼자 밖으로 나와 춤을 추면서, 루디는 독일에 두고 온 아내를 다시 기억한다. 그러나 따뜻한 손이나 상하기 쉬운 음식은 어떤 이들의 기억에는 남을지언정 늘 어쩐지 불완전하고, 해외 반출이 어렵다. 후지산을 배경에 두고 죽은 루디의 몸은 이제는 성한 모습으로 독일에 도착할 수 없고, 불에 탄 고운 가루만이 빠져나올 수 있다. 죽은 이를 애도하며 마침내 나름의 방식으로 형태화하던 춤추는 몸은 무거워서, 일본의 공기에 퍼지도록 두고 가야만 한다. 몸을 여기로 저기로 보내는 일은 늘 그 대상을 조금씩 반대편에 놓고 온다. 아직 움직일 줄 아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아들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춤추는 인구는 어디에나 조금씩은 남아있고, 유도 여전히 공원으로 나와 춤춘다. 수화기 반대쪽에는 아무도 없어도. 우리는 언제나 통화 중이에요.
글쓴이 오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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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들은 스크린을 지배하지 못한다. 그들의 존재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비하면 흐릿할 뿐이고, 육체는 부동하거나 사라진 지 오래다. 그들을 직접 지칭하는 것들은 사진, 숫자, 말, 확실하거나 확실하지 않은 병명이다. 딸이 죽지 않았다면 올해로 스물세 살이었겠지. 지주막하출혈이라니, 갑작스럽게 무슨……주인공 가후쿠의 죽은 아내 오토는 영화의 대부분을 감정 없이 <바냐 아저씨>를 읽는 목소리로 등장한다. 연극배우인 가후쿠의 연습을 위해 바냐의 대사가 빠져 있으므로 그 목소리를 담은 카세트테이프는 온전히 한 작품이 되지 못한다. 가후쿠와 오토의 네 살배기 딸은 활짝 웃는 사진과 ‘2001년 2월 25일 사망’이라는 문구만으로 영화 안에 있다. 히로시마 연극제의 운전 일을 하는 미사키가 죽은 엄마를 기억할 수 있는 곳은 산사태에 무너진 집터가 전부다. 그들은 죽었다. 그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크고 불투명한 상처를 남겼을지라도. 이제 그들은 하느님의 성이건 검은 흙 밑이건 지장보살의 관할지이건 아무튼 현재는 아닌 곳에서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쉰다. 이곳이 연극 무대라면 그들은 이미 퇴장했다. 무대 뒤 대기실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타 마시고 있을 테다. 문제는 아직 무대에 남은 사람들이다. 이야기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죽은 이들의 멈춘 심장과는 다르게 요동친다. 하지만 죽은 이들과의 연결 실패가 인물들에게 끈질기게 고통을 주건 말건, 어떤 무대에서든 연기는 계속된다. 정해진 대사를 뱉고 정해진 자리에 가서 설 수 있도록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고통만큼이나 계속되어 온 대사 연습의 이유다. 아내가 죽고 2년 후 가후쿠는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연극제에서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공연을 준비하게 되는데, 자신이 바냐 역할을 맡는 것은 거부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연기 방침을 배우들이 숙지하도록 요구한다. 연습에서는 대사에 어떤 감정도 싣지 않을 것. 동아시아 각국에서 모여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배우들에게 몸짓 언어도 표정도 없이 이루어지는 문장과 다음 문장의 연속은 부적절한 소통의 순간일 뿐이다. 이 무감정의 연속이 언젠가 발휘할 마법의 순간에 배우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몸짓이 가후쿠가 믿고 또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믿는 연기지만, 늘 그렇게 일이 잘 풀리지는 않는다. 아내 오토와 친했던 배우인 다카츠키는 연습 때마다 가후쿠에게 지적을 받는다. 언젠가 가후쿠는 다카츠키에게 말한다. 대본에 자신을 맡겨. 정작 가후쿠는 연기할 때마다 인물이 아니라 자신이 무대에 끌려 나오는 것 같다며, 바냐 역을 맡기를 거부한다. 타인의 연기에 영향을 미치려 하면서도 가후쿠는 딸과 아내의 죽음 이후 어떤 얼굴로 살아갈지에 대해서는 결정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딸이 죽은 이후 오토와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오토가 다른 사람들과 섹스했던 것에 상처받았다고 여기면서도 그 감정에 관해서는 아내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그는 자신의 현실에서도 대사 연습을 거듭해왔을 뿐이다. 말과 움직임으로 타인의 몸에 닿는 마법의 순간은 겪지 못한 채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확신하지 못해 전희의 순간에도 눈을 가려 버리면서. 영화 초반부가 그리는 오토의 죽음 이전 장면들에서, 가후쿠와 오토는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그들은 늘 컴퓨터 스크린으로, 거울로, 감은 눈이나 손으로, 무대와 객석 사이로, 자동차 운전으로 인해 같은 공간에서도 분리되어 있다. 부탁이니까 제발 앞을 봐. 가후쿠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운전하려는 오토에게 말하지만, 그 문장은 물리적인 사고의 암시가 아니라 눈 맞춤에 관한 것이다.* 연기는 매 순간 이뤄지고 있음에도 우리는 대사에 몸을 던지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사람들은 죽어버리고, 그러면 더는 같은 무대에 함께 서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라졌더라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하는 연기가 현실의 예상치 못한 사건들로 끊임없이 방해받더라도, 살아가고 일하는 일의 보람참과 실패도 계속 거기에 있다. 가후쿠가 아내의 죽음 이후에도 연극 일을 그만두지 않았듯이 홋카이도에 죽은 엄마를 두고 히로시마까지 내려온 미사키는 엄마의 죽음 이전에도 그랬듯이 계속 운전 일을 한다. 잠을 자려는 엄마를 깨우지 않기 위해 익힌 고요한 운전도 계속 유용한 기술로 남는다. 소냐 역으로 연극에 참여하는 한국 수어를 하는 농인 유나는 아이를 유산한 이후, 한동안 그만두었던 공연 일을 다시 시작한다. 그가 무용수로서 익혔던 움직임의 기술은 연극에서도 여전히 사용된다. 한때 파괴되었던 히로시마에서 사람들은 불타버릴 쓰레기를 매일 생산하고, 부서졌던 돔은 지금도 공사 중이다. 그러나 이 힘찬 노동과 움직임 중 어떤 것도 극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폭설이 모든 것을 덮는다고 하더라도 부서진 집터가 완전히 가려진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집의 존재를 보았던 이는 반드시 그곳에서 없어진 무언가를 눈치챌 테다. 죽은 사람들은 지금의 무대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만든 역사는 움직이는 이들의 몸에 남아있다. 연기와 생활의 방식 아래에 죽은 이들은 백색소음처럼 깔려 있다. 따라서 침묵은 찾아오기 어렵다. 무대 장치 사이를 누비는 발소리나 숨소리나 사람을 초조하게 하는 셔터 소리나 부드러운 엔진 소리가 만연해 있다. 영화 전체에서 어떤 소리도 없이 침묵할 수 있는 때는 미사키와 가후쿠가 미사키가 떠나온 무너진 집을 방문하기 위해 홋카이도로 진입하는 짧은 순간뿐이다. 그들은 눈 덮인 시골길을 달리다 꽃 판다는 현수막 앞에 멈춰 섰다가 다시 떠난다. 압도하지는 않지만 사람들 얼굴을 빨개지게 하는 찬바람 소리는 금세 돌아온다. 폐허가 된 미사키의 집을 내려다보며 미사키와 가후쿠는 서로를 안는다. 죽은 이들은 명확하고 그리운 형상으로 다시 돌아오지는 않지만, 죽은 자들보다 그들이 남긴 그런 것들의 존재가 지금 살아있는 그들의 얼굴을 만들었음을 그들의 나란한 입김이나 나란한 담배 연기 사이로 문득 기억해낼 수 있다. 무대를 떠난 이들과는 다르게 무대 위에 선 이들은 계속 말하거나 계속 움직여야 하며, 어떤 말들은 연습의 순간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무심한 목소리로는 그냥 흘려보낼 수 있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보이고, 무언가 일어나기 전보다 더 두텁게 쌓인 배경음 안에서 일하게 된 이들은 눈으로 끈질기게 그 말을 따라가야 한다. 가후쿠는 결국 바냐가 되어 그 마법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때 그는 바냐인가? 아니면 그 자신인가? 삶과 이야기가 어처구니없게 마주칠 때 우리는 어떻게 연기하는가? 미사키가 관객석에서 그의 움직이는 눈동자를 듣고 있다. *남다은, “어둠을 밝히는 손”, 필로 23호, 2021.
글쓴이 오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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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된거야 Tout s'est bien pass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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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완성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만약에 삶을 하나의 작품에 비유하자면, 모두는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펜이나 붓을 들고 누군가가 원고지나 캔버스를 거두어가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문장을 덧붙이고 물감을 더하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점점 정신이 흐려지고 손의 감각이 퇴화되기 시작한다. 펜을, 붓을 놓을 수는 없는데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소중한 당신의 작품이 점점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기 시작한다. 기약 없는 기다림 끝에 당신은 어떤 끝맺음을 선택할 것인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 앙드레는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무너져내려가는 얼굴 근육, 점점 가누기 힘들어지는 몸,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생활. 앙드레는 나날이 악화되어가는 자신을 두고 ‘이건 내가 아니야.’라고 말한다. 숨만 쉰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앙드레는 자신을 존중하기 위한 방법으로 죽음을 떠올린다. 삶이 유한하기에 소중한 것이라면, 끝을 맺는 방법 또한 응당 존엄해야 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앙드레는 끝내는 것을 도와달라고 자신의 딸인 엠마뉘엘에게 부탁한다. 과거에는 불화가 있었고, 엄청나게 애틋한 부녀관계는 아니었더라도 이제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중년의 자식으로서, 그리고 자살을 금기시하는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이러한 부탁이 엠마뉘엘에게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앙드레는 이미 마음을 굳힌 후였고, 설득은 통하지 않는다. 바쁘다는 이유로 띄엄띄엄 병문안을 해도 매번 물어본다. 결국 앙드레를 위해 안락사에 대해서 알아보는 엠마뉘엘. 다행히도 안락사를 위한 비용을 감당할 경제적 능력이 되는 엠마뉘엘은 금전적으로는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는 자조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앙드레가 몇 입 겨우 먹은 연어 샌드위치를 버리려다 혹시 몰라 냉장고에 넣어둔 것처럼, 엠마뉘엘은 앙드레가 마지막에라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내심 바라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부모의 최후에 일조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다 잘 될 것이라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목표가 아니었다. 엠마뉘엘은 고뇌하고, 아버지와 갈등하고, 다른 이들에게 방해받는다. 그럼에도 앙드레는 변심하지 않았고, 법적인 문제로 인해 한자리에 있을 수 없었던 엠마뉘엘은 앙드레의 선택을 전해 듣는다. 엠마뉘엘은 아버지를 죽인 것이 아니었다. 앙드레가 자신을 죽여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끝내는 것을 ‘도와달라’라고 말한 것처럼, 이는 앙드레의 온전한 선택이었다. 점차 수동적으로 전락해버리는 삶 속에서 스스로 다운 마무리를 위하여.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는 아마 엠마뉘엘 또한 확신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빠의 친구로서 최선을 다해서 도왔다고. 다 잘 된 거야.
글쓴이 팥죽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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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 2009 | 114’
금요일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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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으로 남은 사람의 이야기는 남겨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살아있다면 어땠을까, 그 바보 같은 질문이 끊임없이 허공을 맴돈다. 이 영화 속 미완으로 남은 사람은 준페이다. 어느 여름날 바다에 빠진 소년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준페이는 그렇게 가족들 곁을 떠났다. 이후 유일하게 기대했던 장남의 부재에 아버지는 마음의 문을 닫고, 어머니는 살아남은 소년 요시오를 원망하며, 차남 료타는 열등감을, 딸 지나미는 서운함을 안고 살아간다. 준페이의 기일을 기리기 위해 모인 가족들 각자의 마음에는 이렇게 상처가 하나씩 남았다. 그 상처는 비밀이 되어 가족들 사이에 벽을 세운다. 암묵적으로 하지 않는 이야기와 모른척하는 순간들이 섞여 가까워야 할 가족들을 서로에게서 밀어냈다. 이미 떠난 누군가의 존재가 자꾸만 상처를 더했고,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마치 어머니를 떠나자마자, 아들을 보내자마자 지난밤의 대화 속에서 기억해내지 못한 스모선수의 이름을 떠올린 두 사람처럼, 아들의 차를 타고 쇼핑을 가는 것이 소원이라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차를 장만한 료타처럼, 모든 순간이 어딘가 엇나갈 것만 같았다. 꼬리에 꼬리를 문 감정과 솔직할 수 없는 답답한 현실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하지만 영화는 담담한 삶의 순간을 비추며 끝난다. 새로운 생명과 반복되는 가족애 속 평화롭게 흘러가는 일상을 담는다. 그 모든 감정과 비밀이 얽히고설켜도 시간은 흐른다는 걸 보여주듯, 또 어떤 여름날을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누군가 떠나도, 또 떠나도, 삶은 흐른다. 여전히 노란 나비가 날아다니듯이.
글쓴이 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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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한 주
안녕하세요 여러분! 늦었습니다. 수요일 잘 보내셨나요? 종강이 다가올수록 정신없이 바쁘다가도 일순 파도처럼 밀려오는 한가함을 반가워할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있는 일정을 까먹는다거나(🤭), 할 일을 미루다 늦는다거나 (😭) 하는 일 없이, 한 학기 마무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이번 편지로, 23년 1학기에 이화 시네마떼끄에서 상영되었던 모든 영화가 빠짐없이 뉴스레터로 발송되었어요. 그동안 즐거우셨나요? 곁눈질로 흘겨보는 게 다였대도 저희는 만족합니다. 한 학기 분의 편지를 보낼 동안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다음주에는 정규편성에 없는, 뒤에 숨은 이야기를 들고 오도록 할게요. 무슨 내용이 담길지 기대 많이 해 주세요. 다음주에 만나뵐 때는 정말로 많은 분들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편지를 열어볼 수 있지 않을까 살포시 기대해 봅니다. 여러분, 이번주 마지막까지 힘내서 이겨냅시다! 응원할게요.
그리고, 편지는 월요일에 다시 올게요!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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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시네마떼끄
ewhacinemathequ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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