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보내는 마음으로>를 기획한 라임입니다 💚
다가오는 여름을 잘 맞이하고 계시는지요. 추운 겨울에 떠올렸던 기획을 초록이 가득한 6월에 다시 생각하려니 새삼 시간의 흐름이 훅 느껴집니다. <보내는 마음으로>는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처음 이 기획을 떠올리곤 남겨진, 사랑했던, 사랑하는, 살아갈 사람들에 대해 오래도록 곱씹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결국 나이고 우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는 모두 남겨진 사람들이니까요. 저는 아직도 잘 모릅니다. <보내는 마음으로>를 기획하고 운영위원들과 함께 세미나를 진행하고 상영을 준비하던 때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여전히 앞으로 어떻게 사랑해야 살아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남겨진 사람답게 남는 법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역시 우리는 우리라는 점입니다. 이제 나 혼자 겪는 일이 아니라는,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뻔한 명제가, 이 새로운 우리가 주는 힘에 대해 생각합니다. 내려앉은 바닥에 포근한 따뜻함이 있다는 걸 애써 느끼고 있습니다. 결국 남겨진 우리들이 그 따뜻함을 만든다는 걸 기억하려고 합니다. 여러분께도 이 새로운 위로가 잘 다가갈까요? 부디 그럴 수 있길 바랍니다.
따스하길 바라며 떠올린 기획은 맞지만, 아무래도 감정이 힘들 수 있는 영화들이니 감상에 유의해주세요.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페이퍼들은 꼭 읽어보길 추천합니다. 역시 작은 위로가 될 테니까요.
🌙 달을 기억하며, 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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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은 아픕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우리를 잃는다는 건 내 세계가 흔들리는 경험입니다. 그런 상실을 겪은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던 무수히 많은 것들에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에게 없는 내일이 왜 나에게는 남아있는지. 모든 것이 삐딱하게 보입니다. 그만큼 상실은 어렵습니다. 여전히 내 곁에 머물 것만 같은 그를 떠올리고,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과 나눴던 마음을 자꾸만 곱씹게 되니까요. 가끔은 후회까지 덧붙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걸 알아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딱히 그럴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차라리 피할 수 없어서라는 말이 어울립니다. 밀려오는 생각과 감정 그 무엇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실은 필연적입니다.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태어나, 살고, 사랑하기 때문에 상실은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우리가 됩니다. 상실 이후 ‘우리’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 자리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우리 모두 상실을 경험하기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도 위로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이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여덟 편 모았습니다. 그들이 내일로 나아가는 모습과 상실이 우리를 새로운 우리로 이끈다는 말이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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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駅までの道をおしえて
화요일 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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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드와이용 | 1997 | 97’
화요일 2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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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정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그 정체를 온전히 소화하기에 시간이 걸린다. 뽀네뜨는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던 중 사고를 당하고, 가볍게 팔을 다친 뽀네뜨와 달리 엄마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어린 뽀네뜨에게 엄마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이전에 이해하기부터가 힘든 것이었다. 아빠 또한 아내를 잃은 슬픔을 수습하기도 전에 출장으로 인해 뽀네뜨를 고모네에 맡기고, 뽀네뜨는 친척집의 아이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뽀네뜨가 자신이 낮에는 같이 노는 친구들과, 밤에는 엄마와 함께한다고 주장하듯이, 이전과 다름없는 아이인 뽀네뜨와 엄마가 없는 세상에 적응해야 하는 남겨진 뽀네뜨는 혼란을 느낀다. 영화 <뽀네뜨>는 그런 뽀네뜨가 엄마를 잃고 상실감을 받아들이고 다시 일상으로 온전하게 회복하는 과정의 일부를 그린 영화다. 아이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을 치는 와중에도 아이에게는 불현듯 슬픔이 다시 찾아온다. 네 엄마는 죽었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아이의 말에 울지도, 반박하지 않다가도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외우는 부활의 주문을 기억하고는 엄마가 돌아오길 바라며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외친다. 영화는 뽀네뜨의 심정을 직설적으로 해설해 주지는 않는다. 어린 뽀네뜨의 마음속만큼이나 모호하고 복잡한 감정을 관객들로 하여금 대화나 행동 속에서 읽어내도록 한다. 엄마의 무덤을 파헤치며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뽀네뜨. 그런 뽀네뜨 앞에 기적처럼 엄마가 나타난다. 오랜만에 재회한 엄마는 뽀네뜨에게 여러 가지 당부의 말을 남기며 딸에게 가진 애정만큼의 온기를 불어넣은 빨간 스웨터를 입혀주고 사라진다. 뽀네뜨는 행복을 배워나갈 것이다. 저절로 슬픔이 가시고 행복이 현현하길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잠깐이나마 다시 만날 수 있었던 엄마가 말해주었듯이, 즐겁고 신나게 뛰어올라 추억을 잡고, 죽기 전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세상을 놓지 않으며.
글쓴이 팥죽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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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 나오키 | 2022 | 126'
화요일 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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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는 수많은 기능이 있다. 유년 시절에 반려견과 이별한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나도 떠올릴 때마다 사야카의 엄마를 슬프게 한다. 마찬가지로 오래전 아들을 잃은 기억은 후세 할아버지에게 평생의 그리움을 남긴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게 세상의 이치라는 걸 알아도 그 이별의 시기는 아무도 모르기에, 인간에게 이별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이별의 기억은 만남의 기억을 상쇄할 만큼 아프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동떨어져 소외감을 느끼는 사야카에게 가게 유리창 밖 우리에 내팽개쳐진 루는 처음엔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지는 꼬질꼬질한 개였지만, 곧 사야카의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된다. 함께 거리를 가로지르고, 빨간 전철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몸집이 크지 않은 개와 어린이 정도만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을 통과하면 펼쳐지는 비밀의 공간에서 마음껏 뛰놀고, 흙을 파내고, 물을 나눠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은 모든 만남의 기억. 눈부시게 행복했던 만남의 기억들은 갑작스러운 이별, 그 하나의 기억으로 인해 순식간에 고통으로 변한다. 함께했던 기억들이 너무나 즐거웠기에, 이별이 더 아프다. 그렇게 좋지나 않았으면 이별이 이토록 힘들진 않았을 텐데. 찬란했던 지난날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다. 이별 때문에 만남마저 저주하지 않기 위해 사야카와 후세는 온 힘을 다해 노력한다. 소중한 존재와의 이별이 처음인 어린아이에겐 더욱 힘든 과정이다. 같이 걷고 뛰놀던 곳에 이젠 홀로 있고, 같이 보던 전철 또한 혼자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은 가혹하다. 그러나 사야카는 루를 만나 키우기로 결심했던 그 순간부터 루와의 만남을 후회한 적 없다. 그래서 사야카는 최선을 다해 루를 추억하고, 같은 상실의 아픔을 겪은 후세 할아버지의 재즈카페에 매일같이 드나들며 고이치로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떴을 그를 상상한다. 더 이상 고이치로를 기억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후세와 이제 그만 루의 집을 치워도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묻는 외숙모의 말을 못 들은 척하는 사야카는 서로에게, 유일하게 자신의 상실에 대해 터놓고 말하며, 상대의 상실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동지가 되어준다. 둘은 샌드위치를 싸 들고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찾으러 함께 바다로 ‘데이트’를 가 소중한 추억에 마음껏 젖는다. 가끔 기억은 공유되고 가공됨으로써 제 기능을 찾기도 한다. 역이 갖는 만남과 이별의 양면적인 상징성은 유구하다. 사야카와 루가 함께 열심히 흙을 파내 발굴한 정체 모를 기다란 두 막대는 어느새 후세와 고이치로, 루가 탄 빨간 전철의 선로가 되었다. 사야카가 서있는 곳의 맞은편에 있는 역에서는 후세와 고이치로가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상봉한다. 후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행복해 보인다. 사야카는 당장이라도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엄연하고 명백한 벽이 존재한다. 그곳으로 갈 수 없다면 사야카가 할 수 있는 일은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뿐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어린 사야카에겐 가장 어려운 일이었지만, 사야카는 마침내 손을 흔든다. 후세는 역에서 아들을 직접 만나는 순간까지 끝내 아들에게 손을 흔들지 못했지만, 사야카는 해낸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남은 루의 기억들을 정리해 차곡차곡 보관한다. 어떤 기억은 평생을 살리기도 한다.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 자주 보던 아주 낡고 소중한 동화책을 펼쳐 읽어주는 듯한, 추억과 행복함에 잠겨 읊조리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듯한 어떤 이의 목소리에서 알 수 있다.
글쓴이 연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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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메론 미첼 | 2011 | 91'
수요일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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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척하는 사람은 위태롭다. 유약하고, 투명하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척하고 있는지 다 보이는데 본인만 모른다. 그래서 자기 자신한테도 척을 한다. 괜찮다고, 스스로 그렇게 믿어버린다. 베카가 그렇다. 아들 대니를 잃은 지 8개월이 되자 이 정도면 됐다고 판단해버린다. 할 만큼 했어, 더 이상은 필요 없어.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선언하고 돌아선다. 하지만 모두가 안다. 괜찮지 않다는걸. 왜인지 베카의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한 부모들의 모임은 마음에 들지 않고, 나의 현실 앞에 신의 뜻을 들먹이는 사람은 짜증이 난다. 신이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가학을 즐기는 변태일 것 같은데 교회와 신에게서 위로를 찾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엄마가 베카의 오빠가 죽었을 때와 대니를 잃은 지금을 비교할 때는 강아지 뒤를 쫓다 사고로 죽은 네 살 아이와 헤로인 과용으로 죽은 서른을 비교하지 말라며 끝내 상처를 주고 만다. 겉으로는 동생 리지의 임신 소식을 축하하지만 어쩐지 기분은 묘하고, 리지의 아이 이야기만 나오면 이성적으로 행동하기가 어렵다. 자매 간 대화도 리지의 생일도 자꾸만 망쳐버린다. 열심히 심은 꽃은 이웃이 실수로 밟고, 식당의 메뉴판엔 끌리는 메뉴가 없다. 분명 괜찮은 것 같은데 삶의 모든 순간이 삐걱거린다. 호위의 생각은 좀 달랐다. 우리는 괜찮지 않았다. 대니와의 추억과 함께한 시간, 그리고 대니가 남기고 간 흔적들을 잘 정리해야 했다. 달라진 베카와의 관계도 새롭게 시작하려면 그 모든 걸 잘 정리해야 했다. 무작정 가리고 치우고 덮어놓는 게 아니라.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척을 내려놓고 대화해야 했지만, 베카는 절대 넘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호위는 베카 대신 같은 상처를 공유하는 또 다른 사람 개비와 충동적인 관계를 맺는다. 함께 대마초를 피우고, 각자의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눈물 흘리는 부모들 사이에서 실실 웃는다.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과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다. 어딘가 엇나가는 느낌이다. 대니의 무게를 함께 짊어진 제이슨도 일상이 어렵긴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과속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그 길로 가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 왜 아이를 보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래서 베카에게 미안하다는 고백을 전한다. 죄송해요, 어쩌면 제가 과속을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30길로까지만 갔어야 했는데 32, 33이었을 지도 몰라요. 그때 그 길로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강아지도 아이도 정말 못 봤어요. 그래도 죄송해요. 어려운 말들을 내뱉는다. 그런 제이슨이 그린 만화에는 ‘래빗 홀’이 있다. 수많은 가능성들이 각각 실현된 수천수만 개의 평행 우주가 있다. 어떤 우주에서는 대니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지도 모르고, 또 어떤 우주에는 다른 누군가가 없을 지도 모른다. 어떤 우주에서는 모두가 서로를 몰랐을 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는 그저 우리의 슬픈 버전 중 하나이겠구나, 제이슨의 레빗 홀은 베카에게 담담한 위로가 된다. 이제 베카와 호위는 준비가 되었다. 더 이상 왜 대니여야 했냐고 화내는 대신, 우리의 우주를 수용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슬픔의 돌을 마음 깊은 곳에 넣어둘 준비가 되었다. 누군가 물으면 툭 꺼내 보여줄 준비가, 주머니에 넣어둔 채 어디론가 떠나볼 준비가 되었다. 대니와의 이별은 선택할 수 없는 변화였지만, 이제는 나의 힘으로 새로운 래빗 홀을 찾아 나설 준비가 되었다.
글쓴이 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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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 어떤 설화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아시아인의 외형을 가지고 태어나 중국에 대한 정보들을 저장하고 있지만 아시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거나 중국을 직접 경험한 적은 없다. 그는 인간의 혈통을 타고 내려와 그곳에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공장이나 실험실에서 태어나 돈으로 거래되어 사람들의 집에 간다. 그는 사람들의 형제자매가 되지만 정확히는 그 집안과 과거에도 앞으로도 관계가 없다. 그는 로봇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테크노사피엔스’라고 불리는 더 복잡한 종류의 구성물이다. 그러니 유전자나 국적이나 세포의 생김새나 하는, 대부분의 유기체에게 태어날 때부터 부여되는 이야기들이 그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이 구분되지 못하게 섞인 상태에 있다. 그러나 그런 부정확성이 그를 불완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태몽으로 쓰일 만한 꿈이 없다고 해도, 그는 신화나 믿음보다는 기록된 삶의 서사를 바탕으로 하는 이에 가깝다. 사실 설화에 관련한 문제는 단정 짓기는 까다롭다. <애프터 양>의 인물들은 대부분 설화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물들이 사는 곳은 미국 어딘가인 것 같기는 하지만 우리가 아는 어느 곳이라 말하기 힘들다. 행인들은 아시아풍의 옷을 입고 있고, 건축물들은 어느 문화에서 비롯되었는지 출처를 찾기 어렵다. 문화 테크노로서 양이 살게 된 집에는 입양된 중국계 아이인 미카가 있다. 미카의 아버지 제이크는 서양인의 얼굴을 하고 차 전문점을 운영한다. 모두가 어느 정도는 모호한 곳에서 인물들이 가진 설화는 정체성을 지탱해 줄 뿌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지 못한 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아시아인을 혐오하는 조용한 포스터나 복제인간 이웃에 대한 불편한 마음 같은 것들은 누군가를 알지도 못한 채로 구성된 섣부른 이야기들이다. 모두가 애매한 곳에서 양은 누구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딱 자신만큼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이며, 그 복잡성은 온전히 그 자신의 역사에서 온다. 몇 겹의 삶. 압축되고 확장되는 삶. 정지한 몸 밖으로 나와 상영될 수 있는 큐브 모양의 기억 저장소가 그것을 증명한다. 한 번에 몇 초밖에 되지 못하는 영상물 형태의 기록들은 양이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리 불가 상태의 고장에 빠져버리고 난 뒤에야 발견될 수 있다. 관객은 양의 구매자이자 가족인 인물들의 눈을 통해서만 그것에 접속할 수 있다. 흠 없는 영화가 목표로 할 만한 일직선의 이어지는 서사가 아닌 아름다운 일상 이미지에 가까운 순간들에서는 무엇을 발견해야만 하는가? 나뭇잎이 퍼진 모양이나 빛이 들어오는 오후의 방이나 엉성하게 널려 있는 빨랫감, 앞뒤를 알 수 없는 ‘고의는 아니었잖아’라는 상냥한 목소리에서. 그러나 분절된 이미지들은 단독으로는 시청각적 쾌감을 줄 무언가일지 모르지만, 그들이 동시에 하나의 장치에 존재하며 이루는 관계는 꼼꼼하게 엮인 숲의 모양으로 드러난다. 단일하지 않으나 공생하는 생명의 상징인 숲은 양의 정체를 단일하게 설명할 대답은 되지 못하지만, 작동 중지 이전의 모든 흔적은 양의 나이 들지 않는 피부나 규격에 맞게 설계된 몸을 그것의 변하기 어려운 특성에도 불구하고 구성해온 이야기와 같다. 이 이야기는 직접 양과 인물들이 관계 맺는 짧거나 긴 저마다의 찰나들에는 발견될 수 없다. 따라서 양의 고장은 뒤늦음에 대한 소용없는 후회와 분리될 수 없다. 양이 아끼던 동생이었던 미카는 양이 수리되어 돌아오기만을 바란다. 제이크는 양이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한다. 어머니 키라는 양을 대체할 수는 없으니 서둘러 잊어야 한다는 듯이 분주하다. 그러나 기억 장치를 통해 양의 기록에 접근할 수 있게 된 이후 인물들은 양의 기록들에서 자신들의 흐린 기억을 겹쳐 볼 수 있다. 하나의 상으로 촬영되어 명료할 양의 것과 다르게 인간인 제이크와 키라가 기억하는 양은 여러 겹의 상(像)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이 뱉은 문장은 여러 번 조금씩 다르게 반복되어 들리고, 기억을 구성하는 영상은 한자리에 머무는 카메라로 찍은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에서 찍은 테이크들이 뭉뚱그려진 형태로 보인다. 양의 짧은 영상들이 그들 각자로는 이야기를 이룰 수 없는 것처럼, 제이크와 키라가 가진 양에 관한 과거의 상도 시간이 지나며 언제든 왜곡될 수 있는 불완전한 자료이다. 그러나 양의 것도 그의 인간 가족들의 것도,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일어나 그들의 현재를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해 보인다. 테크노의 기억도 인간의 기억도, 숲으로 자라나건 점점 흐릿하고 아름답게 장식되건 간에 움직이고 잃어버리고 더해지는 것들이다. 양이 없는 집에서 이 사실을 깨달으며, 양과 관계 맺었던 타인들은 그들의 삶과 양의 생존에 일어난 변화를 죽음과 애도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되며, 그때 테크노며 인간이며 복제인간이며 하는 본래에도 모호했던 차이들은 무엇보다 몸에 가깝게 체험됨과 동시에 위계를 잃어버린다. 듣기와 보기와 감각하기의 매체인 영화로서 <애프터 양>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설화의 언어를 통해서는 적당하게 번역될 수 없는 양 내부에 남은 서사를 관객에게도 몸에 닿는 문제로 여겨지도록 한다. 앞뒤가 정해져 있지 않은 존재로서 양은 어떤 노랫말처럼 무엇이든 될 수 있을지도 모르며, 양 이후의 상실 역시 금세 변화해 밀착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노래가 되고 싶다는 모든 노래할 줄 아는 이의 바람은 불가능에 관한 그리움이 아니라 그저 가능성의 발화일지도 모른다.
글쓴이 오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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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시험기간 잘 보내고 계신가요? 하나 둘 종강해서 비어가는 강의실과 캠퍼스, 지친 듯한 벗들의 얼굴에 남몰래 응원을 보내는 이번 주입니다. 오늘은 말씀드렸던 대로 애도와 남겨진 이들의 마음을 담은 <보내는 마음으로>를 보내드립니다. 6월, 새 잎들이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지금이야말로 떠나간 이들을 떠올리기에 적격인 계절인지도 모르겠네요. 헌 사람, 새 기억, 빌린 마음.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가 여러분에게도 있나요? 함께 떠올려요.
그리고 남은 시험 일정도! 결과가 어쨌든 😂 , 다가오는 끝을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까지 힘내봐요. 아자아자!
돌아오는 수요일에 봐요!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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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시네마떼끄
ewhacinemathequ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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