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아파트라는 건축물은 20세기를 상징하는 주거 방식이다. 모든 이들을 하나의 건물 혹은 단지 안에 집약시켜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생활하게 해 줌에도 현대인들이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고, 아파트가 그 상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속에서의 공간은 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영화들에서 아파트는 마냥 안락하고 편안하기만 한 삶의 터전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현관 앞에서 내려다본, 숨이 막힐 정도로 가로 세로 직선들이 규칙적으로 정렬된 풍경에는 고독과 불안이 서려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파트는 재개발로 사라지고, 새롭게 지어진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무리 지어 서 있는 높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들은 처음 아파트가 세워졌던 190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빼곡하게 세워진 아파트와 그 사이사이 쌓인 다양한 이들의 기억과 흔적을 함께 좇아보자.
*장림종, 박진희,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효형출판, 2009, 24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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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302
박철수 | 1995 | 99' | 목요일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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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이만희 | 1968 | 73' | 목요일 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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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김호선 | 1981 | 140' | 금요일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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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다스의 개
봉준호 | 2000 | 110' | 금요일 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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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과 성욕은 인간 역사에서 전통적으로 동일시되어 온 주제다. 중세부터 음식을 먹는 행위는 종교적 믿음과 교리 아래 인간의 절제되지 못하는 욕망과 비도덕적인 타락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고, 이는 흔히 성욕을 비유하는 소재로 쓰이곤 했다. 식사와 섹스. 남성 권위적인 사회에서 특히나 여성에게 엄격한 규제가 따르는 이 두 행위는 영화에서 갈망과 거부, 결핍과 과잉이라는 상반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새희망 바이오 아파트 302호에 사는 ‘윤희’는 음식과 섹스를 결부시켜 생각하여 음식을 먹는 행위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신경성 식욕부진’을 잃고 있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토가 올라오는 탓에 그녀는 아무것도 삼키거나 소화하지 못해 늘 초췌하다. 윤희는 어릴 적 정육점을 운영하는 의붓 아버지로부터 당한 성폭행과, 이를 피해 냉장 창고에 숨었다가 자신을 따라 숨은 이웃집 아이가 그곳에서 그만 죽어버린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그 이후 음식과 섹스를 본능적으로 거부해 왔다. 그러나 어느 날, 비어있던 맞은편 301호에 ’송희‘가 입주하면서 윤희의 적막한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음식을 만들고 먹는 행위에서 집착적인 희열을 느끼는 송희는 남편과 이혼한 뒤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희망찬 다짐을 한다. 하지만 그녀는 외롭고, 포만한 위장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 그녀는 이웃인 윤희와 친해지고픈 마음에 자신의 주특기인 요리를 만들어 선물하지만, 감사의 인사는커녕 음식을 앞에 두고 경멸에 찬 표정과 헛구역질을 보이는 윤희의 모습에 분노한다. 윤희의 반응을 괘씸해하기도 잠시, 오기가 생긴 송희는 자신의 맛있는 요리로 윤희를 살찌우겠다는 계획으로 매일같이 화려한 요리들을 302호에 가져다준다. 그러나 음식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이는 윤희는 송희가 음식을 가져오는 족족 쓰레기통에 처박거나 변기에 내려 버린다.
마치 창과 방패의 대결 같은 두 사람의 관계가 계속되던 어느 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윤희를 송희가 맞닥뜨리게 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한다. 지금껏 자신이 정성껏 만들어 준 요리들이 쓰레기처럼 한 데 마구 섞여 있는 모습을 본 송희는 이성의 끈을 놓고 강제로 윤희에게 그 음식물을 먹이려 한다. 음식에 대한 송희의 광기는 음식물 쓰레기조차 우걱우걱 씹어 먹고, 윤희를 집에 초대해 선인장 요리를 대접하기에 이른다. 그런 광기 앞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윤희는 자신의 오랜 상처와 ‘그냥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무력한 바람을 털어놓는다. 이후 두 사람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기묘한 연대를 형성하게 되고, 영화가 처음부터 숨겨왔던 섬뜩한 비밀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301.302》는 아파트라는 거대도시의 산물을 배경으로, 결핍과 과잉이 교차하는 현대 도시의 그로테스크한 면모를 그려낸다. 우리는 그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음식과 섹스에 대한 갈망과 거부, 그리고 이로 인한 폭식과 거식이라는 대비되는 증상들을 통해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과 폭력이 얼마나 기괴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목격한다.
*장정일, 「요리사와 단식가」, 『길 안에서의 택시잡기』, 민음사, 1988
글쓴이 옹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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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처럼 평범했던 일요일, 하지만 어떤 남자에게는 그의 생에서 잊지 못할 하루가 된 날이다.
허욱은 그의 연인인 지연과 일요일마다 만나 데이트를 한다. 일요일인 오늘도 역시나 지연을 만나러 가는 길이지만, 그는 담배 살 돈도, 택시 탈 돈도 없는 빈털터리 청년이다. 허욱과 만난 지연이 “우린 빈털터리예요.”라는 대사를 내뱉는 것으로 지연도 마찬가지로 빈털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커피값도 없는 그들은 다방에도 가지 못한 채 거리의 뒷골목에서 사랑을 속삭인다.
계속해서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도는 그들이 잠시 머물기로 한 곳도 그저 어느 공원의 벤치. 지연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허욱을 바라보고, 허욱이 그런 지연에게 얘기를 해보라고 닦달하고 나서야 지연이 말한다.
“무슨 얘기부터 할까요. 우리들의 현재에 대해서… 결혼식은 교회당에서 올릴까요? 드레스는 뭘로 할까요? 아이는 둘만 낳기로 할까요? 아니, 너무 적겠죠. 역시 셋이 좋겠죠? 집은 빨간 벽돌집. 마당엔 꽃을 심어야죠. 그리고 또 무엇을, 무엇을 할까요…”
당장 다방 갈 돈도 없는 허욱과 지연이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애를 키울 수 있을까? 그들이 할 수 있던 선택은 오직 지연이 낙태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낙태 수술비는 또 어떻게 구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어쩔 수 없이 허욱은 공원에 지연과 자신의 외투를 남겨두고 돈을 구하기 위해 떠난다. 허욱은 여러 친구와 사람을 만나며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애써보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돈을 훔치는 것. 결국 그는 자신의 친우의 돈을 훔쳐 지연의 수술비를 마련한다.
지연의 수술이 이루어지는 동안 허욱은 병원을 나와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며 만난 여자와 함께 주점과 포장마차를 돌아다닌다. 만취한 허욱은 공사장에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려 하지만, 머리를 울리는 교회의 종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병원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지연이 수술 도중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허욱에게는 절망뿐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아버지에게 지연의 죽음을 알리려 하지만 헛소리 취급을 받으며 문전박대를 당하고, 돈을 훔쳐서 달아났던 친구에게도 붙잡혀 주먹질 당한다.
고작 하루가 지나가고 있을 뿐인데,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돈은 원래부터 없었지만, 지금은 땡전 한 푼 남지 않았으며 그가 사랑했던 연인도 이 세상에 없다. 일요일의 밤, 모두가 일주일을 마무리하고 새로이 다가올 내일을 맞이하려는 밤. 행복했던 시간은 이제 기억 속에서만 남아있을 뿐이다.
글쓴이 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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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손에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는 두 개비를 문 채 종실은 정신없이 풍선을 터뜨린다. 이 해괴한 행동의 목적은 콜라병의 뚜껑을 따는 소리를 실감나게 연출하기 위함이다. 무거운 음향 장비를 멘 채 열심히 돌아다닌 것에 대한 포상일까, 종실은 광고 사운드에 아주 만족한 바이어로부터 백지수표를 지급받는다. 이제 고생은 끝난 셈이다! 더 이상 이 닭장같은 아파트에 살지 않아도 되고, 자식 교육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뼈빠지게 일하며 노후를 대비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한순간에 거액의 행운을 거머쥔 종실을 세상이 가만히 놔둘 리 없다. 백지수표의 소문을 들은 동료들은 종실에게 술을 살 것을 요구하고, 그날 밤 거나하게 취한 종실은 실수로 자택이 아닌 다른 여자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문도 고장 나 열리지 않고 전화도 통하지 않는 황당한 상황. 다음 날에 열쇠 수리공이 찾아올 때까지 꼼짝없이 외간 여자의 집에서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한편 종실의 집에서는 걱정이 한창이다. 일곱 시면 재깍재깍 집에 들어오던 남편이 두문불출하자 아내는 결국 경찰에 실종신고를 등록하지만, 경찰의 태도는 비협조적이기만 하다. 분명 퇴근하여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까지 보았다는 경비원의 말에 부인의 말에는 두서가 없다며,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을 가능성은 없냐고 묻는다. 설상가상으로 백지수표를 가진 종실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아파트 전체에 퍼지고, 이대로 집에 돌아갔다가는 남녀가 유별한 이 시대의 대한민국에서 취한 채 외간 여자의 집에 묵어 모든 사회적 체면을 잃어버릴 판국이다.
과연 이 이야기의 결말은 어디를 향해 달려갈까. 종실은 과연 아파트 전체에 깔린 수사관들을 피해 수표와 함께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누군가는 종실이 악당들에게 납치되었다 말하고, 누군가는 종실이 자살 기도를 했다고 말하는 이 상황에서, 종실은 문 밖으로 나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 집에 도착하고 나서는, 동료와 가족들에게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둘러대며 위층의 여자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초인종을 눌러 이 시대 속으로 들어가 보자.
글쓴이 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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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가 실종됐다. 이건 큰일인가. 사건 축에도 못 끼는가. 의외의 소득인가. 즐거움인가. <플란다스의 개>에선 그 모든 것이다. 강아지를 생의 마지막 위안으로 여기던 노파에겐 죽음이고, 그보단 덜 쓰라리다 해도 강아지를 동생처럼 돌보던 아이에겐 사랑의 상실이다. 반면 신경 예민한 시간강사에겐 소음 제거라는 목표의 달성이고, 개의 육질에 매혹된 경비원과 부랑자에겐 영양 보충의 귀한 계기다. 엉뚱하게도 경비실 여직원에겐 자아실현의 기회도 된다. <플란다스의 개>는 강아지 실종이라는 작은 사건을 아파트라는 소시민의 생활공간에 던져놓고, 멀쩡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예기치 못할 소동에 빠져드는지를 관찰하는 짓궂은 농담이다.
중심인물은 시간강사 윤주와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 현남이다. 국문학 박사인 윤주는 돈 버는 아내한테 사람 대접 못 받고 교수 자리는 아득한데, 강아지는 짖어대니 미칠 노릇이다. 강아지는 그의 적이다. 없애야 한다. 첫 번째 강아지는 납치 및 감금에서 끝났지만 두 번째 강아지는 잔인하게도 추락사시킨다. 무서운 눈빛의 경비 아저씨와 부랑자에게 윤주는 결과적으로 두 차례 음식을 헌납한다. 그들의 반대편에 정의감은 있지만 주변머리 없고 약간 모자란 20대 초반 여성 현남이 있다. 그는 실종된 강아지를 찾아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 강아지를 못 찾으면 학교에도 안 가겠다는 아이와, 강아지가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자기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한다. 강아지의 생존을 둘러싼 이 선명한 전선은 윤주의 아내가 사 온 강아지가 실종됨으로써 갑자기 혼란스러워진다. 영화는 가파른 추적극으로 바뀐다.
이상하게도 사건이 진행될수록 등장인물들은 내면적으로 점점 멀어진다. 윤주는 뜻하지 않게 경비실 아저씨와 부랑자에게 음식을 헌납해 임시 공조관계가 형성된 것 같지만, 윤주의 아내가 사 온 강아지가 실종되는 순간부터 양자는 적이 된다. 현남의 마음을 움직인 울먹이던 아이는 새 강아지를 구해 즐거워함으로써 현남을 어이없게 하고, 할머니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 조력자 현남에게 기껏 무말랭이를 유산이란 이름으로 남겨 허탈케 한다. 가책을 느낀 윤주가 현남에게 어정쩡한 범행 자백을 해도 멍청한 현남은 못 알아듣는다. 사건이 종결되자 모두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경비 아저씨는 어떤 혐의도 받지 않으며 윤주는 돈을 써서 드디어 교수까지 된다. 불운하게도, 모두에게 선의를 갖고 뛰었던 현남만이 관리사무소에서 근무태만을 이유로 쫓겨난다. 한바탕 우스꽝스런 소동이 지나가고 난 뒤 놀랍게도 세상은 조금 더 사악해진 것이다.
글쓴이 해그리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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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곡차곡 쌓아올린 아파트의 역사🏢
안녕하세요! <휴대-영화>입니다. 다들 앞선 영화들은 잘 감상하셨나요? 아파트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서 주민들 간의 관계와 소통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도 품고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은 이야기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이번 기획을 통해 각기 다른 장르와 이야기에서 아파트라는 공간이 얼마나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학교에 참 많은 눈이 내렸네요. 첫눈이 이렇게나 많이 내리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참 신기한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겨울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하루였어요. 이제 곧 12월이고, 기말 고사만 보면 겨울 방학이겠네요. 한 학기 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추운 날씨가 계속 될테니, 건강 잘 챙기시고 모두 행복한 겨울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봄이 찾아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오늘의 뉴스레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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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시네마떼끄
ewhacinemathequ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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