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영화를 사랑한 감독이 있습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도 있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무엇을 할까? 아마 극장에 가고, 왓챠를 구독하고, 포스터를 모으고, 굿즈를 살 것이다. 영화제에 가거나 시떼에 들를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은, 영화가 너무 좋아서 직접 만들기도 한다.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하는 건 영화 제작에 뛰어든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들이 애정 가득 담아 만든 ‘영화를 위한 영화’를 모았다. 영화를 사랑해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부터 거대한 역사와 제작 전반에 대한 이야기까지, 영화에 바친 헌사들을 통해 그 매력에 푹 빠져보자. 그리고 마음껏 즐기자.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함께 모일 수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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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천국 Cinema Paradiso
화요일 2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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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트의 자코
Jacquot de Nantes
아녜스 바르다 | 1991 |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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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라이프
ワンダフルライフ
고레에다 히로카즈 | 1998 | 118’
수요일 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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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꼭 따라붙는 질문들이 있다. ‘왜 좋아하는가?’, ‘그것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존재해 왔는가?’, ‘그것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같은 것들 말이다. 어쩌면 <시네마 천국>은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물음에 해답이 될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가족과 연락이 두절된 지 어언 30년, 토토는 아주 오랜만에 가족으로부터 알프레도 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전해받는다. 떠나온 고향에서의 경험을 회고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영화를 사랑하는 어린 소년 토토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극장과 영사실에 드나든다. 영사실의 먼지 쌓인 공기와 열악한 노동환경 따위는 소년의 꿈을 저지할 수 없었다. 영사실 위에서 수많은 관객들이 같은 순간에 울고, 웃고, 현실의 괴로움은 잠시 잊은 채 이야기에 공명하는 걸 내려다보고 있으면 그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니까. 토토에게 영화는 삶 그 자체였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세계이자 교본이었다. 토토가 회상하는 과거의 끝자락에서 알베르토는 토토에게 여기에서 계속 살면 이곳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지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겠지만, 몇번 떠나있다 돌아오면 전부 변해있을 것이라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워오라고 말한다. 무엇을 하게 되든 그 일을 꼭 사랑하라는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 알베르토의 말대로 로마로 떠난 토토는 내내 돌아보지 않았고, 결국은 성공한 영화 감독이 되어 알베르토의 장례식을 치르러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그가 자신이 걸어온 길이 아름다워 보일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일을 그토록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다 영화라는 경험에서 얻어온 것들 덕분 아닐까? 극장에 가야만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시절에 TV와 비디오가 등장하면서 시네마 파라디소가 문을 닫게 되는 장면은 우리 시대의 OTT 플랫폼의 등장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향유하든, 영화는 늘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곁을 지켜 왔다. 우물 안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접하게 해 주었고, 겪어본 적 없는 흐름에 공명하는 방법, 나아가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을 부여해 주었다. 그러니 몇번이고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의 불이 켜지더라도 인류는 늘 영화를 사랑할 것이다. 영화가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병률, 「끌림」
글쓴이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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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바르다 | 1991 | 118’
화요일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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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햇볕에 반짝이는 파도와 해변에 누워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자세히 비추며 시작된다. 그러다가 등장하는 새빨간 커튼과 인형들. 이 영화는 특별하다. 영화 안에서 또 다른 영화를 보여주는 색다른 형식과 삶과 영화의 경계가 무너져 자연스럽게 얽혀있는 스토리, 마지막으로 주인공인 자크 드미와 감독인 아녜스 바르다가 영화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로써 우리는 두 시선에서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첫째는 자크와 영화의 관계로, 둘째는 자크 드미와 아녜스 바르다의 관계로.
어린아이는 인형극을 보러 극장에 가기를 또래 친구들보다 좋아했고, 집에 돌아와 직접 판지를 자르고 꾸미거나 나무 조각을 깎아 인형을 만들어 인형극 놀이를 했다. 특히 그의 어린 시절에는 늘 아름다운 가사와 선율의 음악이 배경으로 깔려 있었다. 그렇게 자란 그는 2차 세계대전으로 마을이 혼란스러웠을 시기에도, 아버지의 반대로 영화를 배우러 학교에 갈 수 없는 상황에도 끊임없이 영화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았다. 친구들에게 연기를 부탁해 직접 영화를 촬영하기도 하는 등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간다. 이런 그의 과거가 현재 영화 감독이 된 자크 드미와 맞닿게 되는 지점은 바로 그의 작품에서다. <쉘브르의 우산>, <당나귀 공주>, <로슈포르의 숙녀들>, <롤라> 등의 장면들은 소년 시절, 청년 시절의 기억과 겹쳐지며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어줬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더 극대화시키는 포인트는 바로 흑백과 컬러의 대비다. 지금의 자크 드미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 또는 어린 자크 드미의 현재라고 볼 수 있는 장면은 흑백으로 제시되지만, 자크 드미의 작품 속 장면들은 그 흑백의 긴 이야기 사이에서 쨍한 색감의 컬러로 나타난다.
아녜스 바르다는 이런 그의 일생과 작품을 한데 모아두고 되짚는 일을 해낸다. 첫 장면에서 자크 드미의 피부와 머리카락 등을 가까운 거리에서 담은 장면과 마지막 즈음 꿈과 파도를 이야기하며 바닷가의 그를 담은 장면은 어떤 시선에서 영화와 그의 삶을 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아녜스 바르다는 마지막 장면에서 자크 드미의 뒷모습을 찍으며 또다시 영화와 삶의 경계를 흩트린다. 바르다가 담아낸 자크 드미의 영화와 함께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글쓴이 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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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영화를 만드는 영화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할까? 아마도 그들이 얼마큼 영화를 많이 사랑하는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어떤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내고 싶어하는지를 궁금해하며 시청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러한 영화 예술의 뒷사정을 보여주는 영화는 아니다. 단순히 영화라는 개념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결국 이미지이다. 이미 유성영화와 컬러영화가 영화 산업의 디폴트가 된 이 시기에서 사람들은 새것을 찾는다. 이런 도중 '뱀파이어'라는 1910년대 영화를 리메이크 하기로 작정한 르네의 선택은 결국 이미지 때문이다. 퇴물 감독이라는 불명에스러운 호칭이 자신의 영화가 아닌 배우의 유명세, 음악 감독의 실력 부재 등 자신의 몫이 아닌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판단은 이를 모두 걷어내고 이미지만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흑백 무성 영화를 택해낸다. 배우도 프랑스 백인 여배우가 아닌 매기를 택한 이유이다. 그녀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프랑스어에 문외한이라는 것은 그녀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매기는 왜 타지에 와 이 영화를 선택했을까? 그것은 르네도, 스태프도, 심지어 영화를 밖에서 보고 있는 우리조차도 알 수 없다. 매기는 르네의 전 영화를 보고 자신의 이상향의 이미지를 찾아냈을 것이다. 그 매력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르네의 마지막 필름에서 누군가는 그러한 매력을 찾을 수 있었겠으나, 필자는 그렇지는 못했다.-
스태프들은 어떠한가? 프랑스어를 못하는 매기를 가운데에 두고 자유롭게 프랑스어로 대화를 하며 감독을 힐난하는 그들 역시 그들의 이미지가 있다. 필름 안에서 그 이미지를 뽐내지 못하는 대신,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이미지를 배우에게 입히고, 입을 통해 남의 이미지를 재해석한다. 카메라 렌즈 속에 담기는 매기가, 매기가 입고 있는 성인샵 라텍스 옷이, 망한 시사회 등등. 이 영화는 각 사람마다의 이미지가 모자이크 형식처럼 서로 끼워맞춰진 느낌을 들게끔 한다. 즉, 영화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서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람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에서 느낀 이미지는 어떠한가? 환상적이었나, 혹은 구겨진 것만 같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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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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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 1998 | 118’
수요일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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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언제 끝나냐는 질문에 영화의 끝은 곧 삶의 끝이라고 답하는 감독이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죽음에서 시작한다.
죽은 자들이 완전한 사후세계로 가기 전 거치는 중간역인 림보에서는 늘 영화가 만들어진다. 이곳에서 영화란 삶을 정리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이런 림보를 찾은 죽은 자들에게는 삶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7일의 시간이 주어지고 그동안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의 인생 중 제일 소중한 추억 고르기. 둘째, 선택한 추억을 림보의 사람들과 상세히 공유하기. 셋째, 자신의 추억이 림보 사람들에 의해 성실히 재현되어 한 편의 영화가 되기까지 기다리기. 다섯째, 완성된 영화를 관람하다 영화 속 순간의 감각이 생생히 되살아난 순간, 죽음의 세계로 떠나기.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서사를 되짚어보며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삶을 돌아보는 행위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고, 부끄러운지 이상한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기도 하고, 전혀 모르겠다며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뻔한 장면을 꼽았다 다시 고심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반응을 마주한 림보 사람들은 한결같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들으며 기다릴 뿐이다. 마침내 선택된 순간이 공유될 때는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몇번이나 되묻고, 영화를 만들 때는 순간의 의미와 생동감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이것이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그리는 영화 제작자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 담긴 영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작품에서 영화는 삶의 끝이자 총체이다. 등장인물들은 영화를 통해 지나간 삶의 의미를 찾고, 놓쳤던 감정을 곱씹는다. 몰랐던 사람과 감각을 일깨우고 깨닫게 만드는 것도 영화다. 그러니까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영화란 그런 것이다. 삶의 끝에서도 깨달음을 주는 것, 그리고 죽은 사람에게도 위로가 되는 것.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화를 본다. 영화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은 영화를 만든다. <원더풀 라이프>에는 감독이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절절한 애정이 담겼다. 영화를 통해 그는 우리에게 나지막이 제안한다. 영화가 우리 삶의 어떤 의미를 완성하는 건 아닐까, 하고.
글쓴이 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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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것을 잃지 마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찾아뵙는 <휴대-영화>입니다. 지금쯤이면 다들 중간고사가 마무리될 때네요. 다들 할 일을 마치고 여유로운 휴일을 보내고 계신가요? 저희 시네마떼끄에서는 이 시기를 노려 전주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답니다. 🤭 어쩌면 이 메일을 전주에서 받아보시는 관객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이번 기획은 씨네필이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을, 영화에 대한 사랑스러운 기획입니다. 한편한편 볼 때마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 더욱 커지고는 했던 작품들이에요. 여러분의 마음에도 가닿을 영화들이 참 많답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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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시네마떼끄
ewhacinemathequ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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